시란 무엇인가 [2]

입 있는 자는 말하라, 시란 무엇인지를

by 난란

시는 가장 오래된 언어 예술이라고도 합니다. 흔히 장르란 서정(시), 서사(소설), 극으로 이루어진다고 하고, 서사나 극도 시의 형태로 출발했다고들 하니까요. 글을 아는 사람도 많이 없고 기록할 만한 것도 충분치 않았던 시절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 위해서는 음악적인 요소가 필요했을 겁니다.


시가(詩歌)라는 말도 결국 시와 노래의 밀접한 연관성을 드러냅니다. 이야기든 극이든 시로부터 출발했다는 이야기는 시가 지니는 음악성과도 연결된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이처럼 시는 인간 곁에 오랫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제법 친숙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익숙하다고 해야 할까요? 당장 제 아버지께서도 "시몽, 너는 아느냐. 낙엽 밟는 소리를…… "로 시작하는 구르몽의 시의 첫 구절에서 넘어가지 못하시지만 제게 "시란 사람을 감동시켜야 하는 것이야. 아버지에 대한 시를 써라!" 라고 일갈하시거든요. 아는 스님께서도 "하늘 색이 어떻다고 생각하니? 파랗다고 하면 안 된다. 그건 시가 아니야." 라고 일러주십니다. 다들 제게 시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죠. 저는 시로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도요.


그러면 저는 그분들 앞에서는 예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어른들 말씀에 토 달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라기보다는, 그분들 말씀도 다 일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고 했다는데, 시에 대해서라면 "입이 있는 자는 말하라"라는 말이 금과옥조인가 봅니다. 아버지나 스님뿐만 아니라 정말 많은 사람들이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시모니데스: 그림은 말 없는 시이고, 시는 말하는 그림이다.
T. S 엘리엇: 시는 고급 오락이다.
워즈워스: 시는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 범람이다.
셸리: 시는 가장 행복한 최고 심성의 최고 열락을 표현한 기록이다.
하이데거: 시는 언어의 건축물이다.


하나같이 멋진 말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시모니데스는 회화와 시가 근본적인 동일성이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지난 번 이야기했던 것에 따르면 대상을 색채로 표현하는 그림과 언어로 표현하는 시 모두 포이에시스의 영역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4월은 잔인한 달"로 유명한 「황무지」의 시인 T.S 엘리엇은 시란 고급 오락이라고 했습니다. 고급 지식을 갖추고 시를 오래 붙잡을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겠죠. 엘리엇 본인의 시도 상당한 노력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우니, 그렇게 말할 법 합니다.


낭만주의 시인인 윌리엄 워즈워스와 퍼시 비시 셸리가 시를 감정과 연결지음은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내면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했을 테니까요. "말은 존재의 집이다"라는 말로 유명한 철학자 하이데거는 시에 대해서도 한 마디 걸쳤는데요, 앞서 언급한 말과 연결해 보자면 시란 건축물과 같이 의도에 바탕을 두고 쌓아 올린 결과물이자 인간 존재가 머무는 곳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다들 이것이 시라면서 한 마디씩 거드는 와중에, 시는 고급 오락이라고 한 엘리엇이 이렇게 덧붙입니다.


시의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이다.


맞는 말입니다. 시가 무엇인지 다들 정의하려고 하지만 시에 대한 일관성 있는 정의를 내리기란 불가능합니다. (박철희, 『문학이론입문』, 121.)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모두가 한 마디씩 할 겁니다. 그리고 그 답은 관점과 방법에 따라 달라질 테고요. 달리 말하자면 저마다의 관점에서 시를 정의한 것이 시의 정의의 역사이고, 시의 정의란 다각도에서 정의될 수밖에 없습니다. 재미있지 않나요? 인간이란 무엇지에 대한 답이 무한한 것처럼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도 무한하다는 것이 말입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또 명확성을 원합니다. 그렇다면 저명한 영문학자 테리 이글턴을 불러 봅시다. 『시를 어떻게 읽을까』에서 이글턴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는 행들이 어디서 끝나야 하는지를 작가가 결정하는 허구적이며 언어가 창의적인 도덕적 진술이다. (49)

'도덕적'이라는 것은 인간 경험의 뚜렷한 영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 각도에서 고려되는 인간 경험 전체를 가리킨다. (…) 시가 도덕적이라는 진술이라는 것은 시가 어떤 규범에 따라 엄격한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적 가치, 의미, 목적을 다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도덕적'이라는 말의 또 다른 반대어는 '경험적'이라는 말일 수 있다. (55-56)

시는 도덕적 진술들을 그냥 다루는 것이 아니라 허구적인 방식으로 다룬다. (…) '허구화한다'는 것은 어떤 글을 직접적이고 경험적인 컨텍스트에서 떼내어 더 폭넓게 사용하는 것이다. (59-60)

'허구'라는 말은 어떤 글들을 '어떻게' 적용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일련의 규칙들이다. (…) 허구는 텍스트가 얼마나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66-67)


이글턴은 시의 요소로 허구, 창의, 도덕을 꼽습니다. 시야 당연히 예술이니까 창의적이겠지요. 그러면 잘 이해되지 않는 두 가지를 먼저 생각해 봅시다. 도덕적이라는 것은 인간 경험 전체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시는 이러한 도덕적 진술을 허구적인 방식으로 다룬다는 특징을 지닙니다. 허구적이라는 것은 참/거짓이라는 맥락이 아니라 상상(력)의 개념에 더 가깝다고 보아야 할 듯합니다.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얽매는 현실 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으로서의 허구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도 마찬가지로)의 내용이 진짜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실 질서, 현실 규칙에서 비롯된 '경험적'인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를 구성함으로써 인간적 가치와 의미, 목적을 다루는 것이지요. 이글턴은 우리는 인간의 복지 향상을 위한 인간적 목적과 이를 뒷받침하는 충만한 가치들에 관심을 갖는다는 점에서 도덕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가치나 질을 필연적으로 다루는 예술가는 보통 사람들보다 더욱 그렇다고 믿습니다. (55)『나니아 연대기』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C.S. 루이스의 글쓰기에 관하여』,40. )


결국 상상을 바탕으로 하는 문학 작품을 쓰는 이유는 대개 두 가지다. 작가로서의 이유와 인간으로서의 이유라 할 수 있다. 둘 중 하나만 있으면 내가 생각하기에는 책이 나올 일이 없다. 전자가 없으면 책을 쓸 수 없고 후자가 없으면 책을 써서는 안 된다.


이글턴은 예술가는 도덕적이리라 믿고, C.S. 루이스는 도덕적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루이스의 의견에 가깝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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