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란 무엇인가 [3]

'낯설게 하기'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기

by 난란


이글턴이 지목한 시의 요소 중 마지막 하나는 언어가 창의적이라는 점입니다. 이게 뭐 별 거인가요? 당연하겠지요. 시가 '어려운 것'이라고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잘 이해가 안 되는',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것이니까요. 시가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무래도 동일한 언어라고 할지라도 일상적으로 쓰이는 것과 달리 뜻을 새로이 시작하는創意 것, 창의적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면 창의적이라는 것은 새롭다는 것이고, 새롭다는 것은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것, '낯선'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글턴은 '낯설게 하기'를 문학성으로 규정한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논의를 가져옵니다. 문학성이란 그 자체를 그 자체로서 독특하게 인식하는 언어, 혹은 달리 말하자면 '낯설게 만들어져서' 독자나 청자에게 새롭게 지각될 수 있는 언어를 의미합니다. (93)


그 자체를 그 자체로라는 게 무슨 소리냐, 그러면 내가 컵을 컵으로 보지 다른 것으로 보냐? 라고 생각하신다면 좋은 질문입니다. 우리는 컵을 그 자체로 보지 않습니다. 물을 담아 마시는 '도구'로 봅니다. 혹은 어느 브랜드의 얼마짜리 '상품'으로도 보지요.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어는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이지, 언어 그 자체로 (잘) 보지 않습니다. 그게 편하고, 그게 자연스러우니까요. 우리는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는 현실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는 상상력이 뛰어나다', '어린이는 시인이다' 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상상하기 힘든 표현을 씁니다. 왜 그럴까요? 언어의 규칙을 아직 완전히 체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출처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어떤 아이가 낮잠을 자다가 햇빛 때문에 깼다고 합니다. 그리고선 "엄마, 햇빛이 눈을 깨물어"라고 말했다고 하더라고요. 훌륭한 표현이죠. 자연물의 의인화라든가 공감각적 표현 같은 개념을 알지 못해도, 아니, 오히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어인 '눈+이+부시+다'라는, 문법에 꼭 맞는, 진부한 표현에서 벗어난 '낯선' 표현을 만들 수 있는 겁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이처럼 '낯설게 하기'를 문학성과 연결지었습니다. 문학의 속성, 문학의 특성, 문학의 성질이란 곧 '낯설게 만들어져서' 독자나 청자에게 새롭게 지각되는 언어를 의미했고, 언어를 '낯설게 만들기' 위해서는 언어의 규범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94) 우리는 언어 없이는 생각할 수조차 없기 때문에 언어가 곧 우리를 만든다고 보아도 좋겠습니다.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한 것처럼요.


바로 그 언어를 낯설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의 진부한 생각, '자연스러운' 생각, '당연한' 생각, 삶의 규칙 같은 일상적 담론이 '낯설게' 변할 겁니다. 즉 삶에 대한 관점이나 태도도 달라질 수밖에 없거나, 혹은 달라질 가능성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글턴은 시를 "우리의 실용적 소통의 창조적 변형"(94)이라고 말합니다. 실용적인 언어의 속성을 비실용적으로, 새롭게 변화시키니까요.


그러면 '일상적이지 않은' 것이라면 다 낯선 것일까요? '낯설게 하기'가 우리의 경제적이고 습관적이며 즉각적인 인식을 '낯섦'을 통해 지연함으로써 규범에서 벗어나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난해함이나 끔찍함 같은 소재나 제재도 곧 '낯설게 하기'가 될까요?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혁명과 모더니즘』에는 '낯설게 하기'에 대한 오해를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난해한 문학을 옹호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것은 '난해시'나 '난해한 소설'의 옹호와는 차원이 다른 얘기다. 사물에 사물 자체의 사물성을 돌려주는 가장 기초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관례적인 언어를 배제하는 순간, '지각의 경제성'을 탈피하는 순간, 대상에 대한 지각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어려워진다'.

'낯설게 하기'는 흔히 오해되듯이 엉뚱하거나 낯설거나 그로테스크한 대상에 적용되는 용어가 아니다 '낯선 것을 보여주는 것'과 '낯설게 보여주는 것'은 종류가 다르다. 시클롭스키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오히려, 너무나 익숙하고 낯익어서 우리의 지각에서 '사라져버린' 것을 낯선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환상시도 '낯설게 하기'를 포함할 수는 있겠지만, 이 경우 '낯설게 하기'를 환상 자체의 산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너무 낯익어서 있는지조차 감지되지 않는 길가의 돌멩이를 돌멩이로서 보여주는 것이 '낯설게 하기'이며, 기이한 모양의 돌이 환상적 변신을 겪는 것은 시클롭스키적 '낯설게 하기'와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162-163)


'낯설게 하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게 생각하고 바라보고 다루어왔던 것, 너무 당연해서 인식하지 못하던 것을 낯선 방식, 창조적이거나 창의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단순히 비현실적인 것이나 난해한 것이 '낯설게 하기'가 아니라는 것이죠. 자, '낯설게 하기'에 대해 계속해서 이야기한 이유는 우리가 좋아하는 시의 매력을 이를 통해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시를 읽을 때 그 시가 '좋다'라고 느끼는 이유는, 혹은 '아, 이게 시구나.', '시답다', 즉 '문학성'이 있다고 느끼는 이유는 시의 표현이 내가 생각지 못했던 것일 수 있고, 시를 통해 새로운 관점을 얻어낼 수도 있개 때문일 겁니다. 그것이 일상적 소재를 썼든 그렇지 않든 말이죠. 다만 '낯설게 하기'를 단순한 비일상적 소재나 난해함만으로 이해한다면 시의 가치를 파악하기 이전에 시 자체의 범위가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 자, 예시를 들어 봅시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 1」을 생각해, 아니, 생각난 김에 읽고 갑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풀꽃 1


짧고 일상적이며 이해하기 쉽습니다. '낯설게 하기'를 단순히 '난해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 시는 시가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건 시입니다. "자세히 보아"야지만 알 수 있는 풀꽃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시인의 기민한 눈빛, 흔하디흔한 "풀"을 "꽃"으로 볼 수 있는 인식의 전환과 더불어 "풀꽃" 같은 "너"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으로 확장되는 이 시 또한 우리의 지각을 '낯설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게다가 마지막 연에는 앞 연과 달리 마침표를 찍어서 "너도 그렇다"에 힘을 주거나, 혹은 더 이상의 반론은 듣지 않겠다는 듯 종료하거나, 평서문의 형태로 마무리함으로써 시를 닫는 것 또한 형식적으로 '낯설게 하기'의 예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이글턴이 제시한 '낯설게 하기'의 예시를 한번 보도록 합시다. 아래 시구절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일지 추측해 봅시다. 시인이 열심히 만들어 놓은 암호 같은 의미를 밝히는 것도 시 읽기의 재미 아니겠습니까?


그대 여전히 순결한 고요의 신부여
그대 침묵과 느린 시간이 길러낸 양자여
우리의 시보다 더 감미롭게 꽃의 이야기를
표현할 수 있는 숲의 역사가여


"그대"란 대체 누구를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잘 생각해 보셨나요? 그러면 이 링크로 들어가서 시인이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확인해 봅시다. 어떤가요? 본인의 생각과 같은가요, 혹은 다른가요?


우리는 보통 이 대상을 위와 같이 표현하나요?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그리고 이런 표현을 읽고 생각함으로써 우리의 인식은 어떻게 바뀌었나요? 생각해 봅시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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