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는 네 가지 방법

넷이자 하나입니다

by 난란

앞에서 언급한 구절은 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의 <그리스 항아리에 바치는 송가>에서 가져왔습니다. 그러니까 "순결한 고요의 신부"이자 "침묵과 느린 시간이 길러낸 양자"나 "숲의 역사가"도 모두 그리스 항아리를 가리키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시를 마주하고 의문을 갖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지? 아니면, 시인은 왜 이런 이야기를 했지? 혹은, 이 항아리는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어쩌면, 이 시를 읽고 나면 내게 무슨 쓸모가 있지? 이런 질문의 방식은 에이브럼즈의 『거울과 램프』에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한국인인 우리에게는 객관론, 표현론, 모방론, 효용론이라는 말로 더 익숙할 것입니다.


문학 작품은 세계를 모방하는 것이다: 모방론
문학 작품은 예술가의 독창적인 정신세계의 표현이다: 표현론
문학 작품은 독자에게 감동과 교훈 같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효용론
문학 작품은 그 자체로 미적인 완결성을 갖춘 독립적인 자율체이다: 객관론


지난 번에 정규 교육 과정이 우리에게 좋은 도구를 주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 중 하나입니다. 객관론을 내재적 관점, 그 외의 것을 외재적 관점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작품 안에 독립적인 의미가 존재한다고 보거나 작품 바깥에 작품의 의미를 결정하는 요소들이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내/외, 안/밖으로 나누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시험을 볼 때처럼 이 네 가지 관점의 특징을 달달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방식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를 활용해 작품을 읽는 데 필요한 질문을 다각도로 던지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이 네 가지 관점은 결국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실컷 구분해 놓고서 하나라는 것은 무슨 말이냐? 하실 수 있겠지만, 이 모든 요소가 작품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하나입니다. 네 요소가 모두 포함되지 않는 작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읽는 사람마다 네 가지 관점에 대한 관심이나 중요도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같은 작품을 읽더라도 작품에 대한 해석이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작품이 제작된 시기의 가치관이나 세계관, 개인 환경 등이 작가의 작품에 반영되듯, 독자의 읽기도 마찬가지로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상의 시 「오감도」를 생각해 봅시다. 오감도 중 첫 번째 시만 한번 가볍게 읽어 볼까요? 긴장하지 않고, 마음을 놓고, 한번 읽어 봅시다. 시는 여러분을 해치지 않습니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다른사정은없는 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상, 오감도 시 제1호


이 시는 대체 뭘 말하려는 걸까요? 시가 어렵다는 건 알겠는데, 이 시는 그 중에서도 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초현실주의라든가 다다이즘이라든가 현대예술이라든가, 이런 종류의 것들이 있습니다. 흔히 "저런 것도 예술이냐?"라든가 "저런 장난 같은 게 예술이면 내가 더 잘 하겠다"라는 반응을 이끌어내는 예술들 말입니다. 예술이란 대체 뭘까,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예술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한 21세기의 우리들도 이상의 시를 보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라는 반응이 대다수입니다.


하물며 백 년 전에는 어떘을까요? 「오감도」는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이었던 이태준의 추천으로 연재되었는데, 1934년 7월 24일 「오감도 제1호」가 실린 뒤 신문사에는 폭탄 테러를 하겠다는 항의가 빗발쳤습니다. 이태준은 사표를 품속에 넣고 다녔고요. 이로 인해 결국 이상의 시는 연재 중단됩니다.


이상의 시는 1934년이나 2025년이나 똑같지만 독자의 반응은 사뭇 다릅니다. 2025년의 독자들은 똑같이 「오감도」를 읽더라도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천재라는 이상의 시니까, 라며 일단 납득해 줍니다. 그리고 이해해 보려고 하죠. 이상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평가가 차곡차곡 쌓이면서, 또는 '시'의 개념이 확장되면서 '저런 것도 시구나'라는 지식이 보편화된 것도 한몫 할 것입니다. 이러나저러나 시 한 편에 폭탄까지 꺼내 드는 당대 문학의 열기에 잠시 가슴이 벅차오르네요.


인간은 복합적이고, 복합적인 인간의 지적 산물인 시 또한 당연히 복합적입니다. 시를 읽는 독자 또한 복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의, 넓게 보자면 문학의 의미와 가치를 잘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각적인 읽기가 필수적입니다. 네 가지 관점 중 하나만 고집하는 것은 정확한 읽기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 관점 중 하나만 고집하는 것은 '정답'을 찾으려는 욕망이 아닐까 하는데요, 엘리엣이 말했다시피 시의 정의의 역사란 오류의 역사 아니겠습니까?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다양한 도구를 가지고 시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더 재밌고 가치 있을 겁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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