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워서 오히려 좋지 아니한가
야콥슨은 소쉬르의 논의를 바탕으로 시적 기능을 체계화했습니다. 야콥슨의 의사소통 모델, 커뮤니케이션 기능 이론에서 제시된 해당 개념은 현대에도 커뮤니케이션학이나 광고 분석과 관련하여 많이 활용되는데요, 시각적으로 보여드리는 것이 가장 명확할 것 같습니다.
번역에 따라 약간씩 다르긴 합니다만, 최대한 이해하기 쉬운 번역어를 포함해 보았습니다. 야콥슨은 의사소통의 구성 요소를 6가지로 나누고, 각 요소가 수행하는 기능을 통해 의사소통의 일반적 모델을 체계화했습니다. 즉, 모든 의사소통은 해당 요소를 포함하고, 이 요소의 정도에 따라 해당 의사소통의 기능이 두드러진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발신자, 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여러 가지 형태의 의사소통의 경험을 떠올려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발신자가 중심이 되는 의사소통의 경우 자연스럽게 발신자의 감정이나 정서를 드러내는 표현적 기능이 발생할 겁니다. 말하는 사람이 중심이 될 테니까요. 수신자에 초점을 맞춘다면 수신자가 이 의사소통을 통해 어떻게 변화했으면 좋갰다, 혹은 수신자에게 의사소통의 효과가 발생해야 하는 것이 주가 되기 때문에 명령적 기능이 나타나겠죠.
맥락이나 관련 상황이 해당 의사소통의 주된 요소가 된다면 그것을 가리키는(지시적) 기능이 두드러질 겁니다. 접촉에 초점을 맞춘다면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교감이나 친교적 기능이 강해질 테고요. 코드나 신호 체계는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합의된 신호 체계를 가리킵니다. 메타(meta)가 '보다 높은'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미루어본다면 메타언어적 기능이라는 것은 의사소통을 이루는 언어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 언어에 대한 언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메시지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는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 곧 시적 기능이 두드러집니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요소들과 기능들은 의사소통의 도구로서의 언어적 기능을 전제합니다. 하지만 메시지 자체, 말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에는 다릅니다. 일상 언어와는 다른 언어, 언어를 언어 자체로 인식하게 하는 '낯설게 하기', 문학성 같은 개념이 이 시적 기능과 맞물립니다. 그런 맥락에서 시적 기능은 심미적 기능이라고도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야콥슨은 시적 기능에 대해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시적 기능은 등가의 원리를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투사한다." 예? 뭐라고요? 등가가 어쨌다고요? 한국말이 맞긴 한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시겠다면 정상입니다. 저도 그랬거든요. 우리는 여기서 다시 소쉬르를 불러와야 합니다.
소쉬르는 기호의 자의성을 규명했습니다. 기호의 자의성이란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자의적이라는 것이고, 소쉬르의 업적은 언어를 실체가 아닌 관계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점에 있습니다. 즉, 단어의 의미가 단어 각각에 고유하게 할당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단어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언어는 개별 낱말들의 단순 집합이 아니라 상호 관계를 맺는 하나의 체계(윤지영, 『현대시 읽기를 위한 이론』, 117.)라는 것입니다. 사과가 배도 귤도 딸기도 용과도 아니라는 관계 안에서 사과가 되는 것처럼요.
단어가 이러할진대, 문장은 어떨까요? 문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장도 언어이며 기호이고, 그렇다면 문장도 관계적으로 구성될 겁니다. 흠, 정말 그럴까요? 문법 규칙을 생각해 보면 간단합니다. 한국어 문장은 주어와 술어라는 관계로 구성되고, 각 자리에 단어들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수많은 문장들이 만들어집니다. 소쉬르는 단어를 '선택'하고 '결합'함으로써 문장이 만들어진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선택의 축과 결합의 축이 등장합니다.
가로축은 결합의 축, 세로축은 선택의 축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생각하고 보시면 됩니다. 먼저 결합의 축을 보시죠. '나는 밥을 먹는다'라는 문장은 [나는]/[밥을]/[먹는다]라는 단어가 결합하여 만들어집니다. 문법적 규칙이라는 틀 안에서 결합되지요. 우리는 이 문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인접성은요? 문자 그대로 보시면 됩니다. 바로 옆에 이웃으로 붙어 있는 (인접, 鄰接) 형국이니 인접성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단어들은 인접성에 따라, '문법에 맞게' 배열됩니다. [먹는다]에는 [누가]. [무엇을]이라는 형태의 단어가 문법적으로 가까이 나열됩(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환유는요? 마찬가지로 인접성을 바탕으로 작동하는 비유라는 점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청와대가 중대 담화를 발표했다."라는 말이 건물인 청와대가 어느 날 갑자기 자아를 가져서 "인간들아, 내 말을 들어라"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청와대에 사는, 인접한, 가까운 존재인 대통령이 중대 발표를 했다고 받아들이는 것처럼요.
다음으로는 선택의 축을 봅시다. 선택은 말 그대로 '선택 가능한' 집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세로축은 유사하기 때문에 대체될 수 있습니다. [나는]+[밥을]+[먹는다]라고 할 때, [나]에는 [개]가 들어가도 되고, [엄마]가 들어가도 됩니다. '밥을 먹는' 존재라는 차원에서 유사하기 때문이죠. [아빠], [동생]. [고양이]…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유사하기만 하다면요. [나는]만 그러한가? 아닙니다. [밥을]도 바뀔 수 있죠. [빵], [고기], [케이크]…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지닌 집합이라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은유는요? 마찬가지입니다. 유사성을 바탕으로 작동하는 비유라는 점을 생각하면 됩니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고 했을 때, 호수와 내 마음의 유사성이 서로 다른 두 대상을 연결하면서 새로운 감각과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떠올려 보세요.
이제 단어를 '선택'하고 '결합'함으로써 문장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야콥슨의 문장을 생각해 봅시다. "시적 기능은 등가의 원리를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투사한다." 선택의 축의 메커니즘은 등가(等價)의 원리입니다. [나]가 [개]나 [엄마]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은 문장 내에서 가치가 같다는 뜻이니까요.
그런데 이 교환 가능한 등가의 원리가 결합의 축에 적용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일상 언어의 차원에서는 결합하지 않던 단어들이 결합할 수 있게 됩니다. 문법적으로 얼마나 '가까운지는' 중요하지 않아집니다. 비문법적인 문장이 나타나게 되지요. 이를 바탕으로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 리듬이나 운율, 반복이나 대칭 또한 가능해집니다. 이를 통해 의사소통이라는 도구적 기능이 저하되고 메시지 자체가 두드러지게 됩니다. 즉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시적 기능에 있어서는 원활한 의사소통 따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메시지 그 자체니까요. 낯설게 하기란 언어를 언어 그 자체로 보게 한다고 말한 것을 떠올려 봅시다.
소쉬르의 업적과 야콥슨의 눈물겨운 노력은 시의 특성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요, 일단 야콥슨이 규명한 시적 기능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일반 독자에게 곧바로 와닿지 않죠. 물론 그래서 재밌는 것도 있지만요. 그리고 조금 더 비판적으로 보자면, 야콥슨은 말년에 실어증 환자들을 연구하면서 은유적 실어증과 환유적 실어증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은유-선택-유사성의 축을 생각해 보면 은유적 실어증은 선택의 축에 문제가 생긴 것이고, 환유-결합-인정성의 축을 생각해 보면 환유적 실어증은 결합의 축에 문제가 생긴 것이지요. 즉 은유적 실어증은 주어+술어와 같은 결합은 가능하지만 "나는 컴퓨터를 낳았다"와 같이 적절한 선택이 불가능하여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문장을 만든다는 것이고, 환유적 실어증은 적절한 단어를 선택할 수는 있으나 각 단어의 결합은 불가능하여 "나, 허기, 밥, 빵"과 같이 말할 수 있을 뿐 문장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앞서 이야기했던 '등가의 원리를 결합의 축으로 투사하는', '의사소통적 기능이 저하'된다는 특징을 지닌 '시적 원리'에 기반한 메시지, 즉 시와 실어증 환자의 발언을 엄밀히 구별할 수 있을까요? 야콥슨의 시적 기능에 대한 설명은 그 요소를 충족하더라도 해당 글 혹은 문장이 반드시 시가 되지는 않는다는 한계도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시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시를 체계화하기 위한 노력과 시도는 학문에 큰 기여를 했고, 덕분에 우리는 시에 대해 더 깊이 알 수 있게 되었지요.
무엇보다 우리가 정확히 알게 된 것은 "시는 어려운 것이다"라는 명제입니다. 일상 언어를 일부터 깨트려서 만든 언어인데 당연히 낯설고 새롭고 의미를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리듬과 음율이라는 내용 외적인 것도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신경 써서 읽어야 하죠. 게다가 양도 내용도 함축적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시를 이루기 때문에 우리는 시를 여러 방향에서, 깊이 읽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시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좋죠. 그만큼 생각하고 읽어낼 부분이 많다는 뜻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