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전체적으로] 먹기

시는 케이크다

by 난란

이제 본격적으로 시를 읽기 전에 반드시 새겨두어야 할 것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건 바로 "시를 전체적으로 읽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시는 언어의 건축물"이라고요. 집을 한 채 짓는다고 한다면 지붕을 뾰족하게 할지 둥그렇게 할지, 문은 철로 만들 것인지 나무로 만들 것인지 대문을 놓지 말지, 그리고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습니까?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도와 목적을 바탕으로 만들어집니다.


압축적인 장르, 응축의 미학, 시를 지칭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아무래도 함축적이라는 부분이 두드러지기 마련입니다. 일단 척 보기에도 소설이나 희곡보다는 양이 적으니까요. 게다가 심장을 찌르는 시구가 머릿속에 오래 남기 마련이라는 점도 한몫 할 것입니다.


허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는 인간의 지적 활동의 산물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시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그 중 어떤 부분이 유달리 마음에 닿는 것 또한 당연한 것이겠지만, 부분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것만으로는 의미를 명확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전체를 다룸으로써 우리의 가슴에 박힌 부분의 의미와 가치를 더 선명하게 밝혀야 합니다. 시는 "멋진 문장"에 그치지 않으니까요.


오랫동안 사랑받는 시인들을 생각해 봅시다. 일단 김소월, 윤동주, 백석, 정지용 등이 있습니다. 해당 시인들은 초판본이 다시 나온다는 점에서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저도 좋아하고요. 그리고 조금 다른 결로 사랑받는 시인이 있는데, 이상입니다. 난해하다고 유명한 그의 시 중에 널리 사랑받는 시(?)가 있는데요, 「이런 시」라는 텍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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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에서 「이런 시」를 향유하는 내용을 가져와 보았습니다. 두 사진 모두 「이런 시」를 다루고 있는데요, 첫 번째 사진에서는 "이런 시는 이상해씨답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마 이상이겠죠? 이상한 시를 써서 이상해씨이고, 시의 제목으로 말장난을 한 것 같습니다. 필사라는 형태로 시를 즐기고 있네요.


두 번째 사진은 시의 부분을 원고지 형식에 넣어 굿즈를 만들었습니다. 세로쓰기라, 고색창연하네요. 첫 번째나 두 번째나 모두 이상의 「이런 시」를 즐기고 있고, 즐기는 구절 또한 거의 동일합니다. 이루지 못한 사랑을 떠오르게 하는 애달픈 내용을 담는 것 같습니다. 자, 그런데 이 시의 전문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한번 읽어 봅시다.


역사(役事)를하노라고 땅을파다가 커다란돌을하나 끄집어내어놓고보니 도무지어디서인가 본듯한생각이들게 모양이생겼는데 목도들이 그것을메고나가더니 어디다갖다버리고온모양이길래 쫓아나가보니 위험하기짝이없는큰길가더라.
그날밤에 한소나기하였으니 필시그돌이깨끗이씻겼을터인데 그이튿날가보니까 변괴로다 간데온데없더라. 어떤돌이와서 그돌을업어갔을까 나는참이런처량한생각에서 아래와같은작문을지었도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수없소이다. 내차례에 못올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그러면 내내어여쁘소서.’
어떤돌이 내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것만같아서 이런시는 그만찢어버리고싶더라.

이상, 이런 시


자, 한번 천천히 읽어 봅시다. 역사役事를 하느라, 그러니까 건물을 짓느라 땅을 파다가 커다란 돌을 발견합니다. 참고로 이상은 건축부를 졸업한 건축기술자였습니다. 어쨌든, 시적 주체는 그 돌에서 기시감을 느낍니다. 어디선가 본 듯도 한데… 기시감을 느끼던 와중 목도들이, 둘씩 짝을 지어 무거운 물건을 지고 나가는 일을 목도라고 하는데요, 목도 일을 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돌을 큰길가에다 버렸다는 이야깁니다.


그날 밤에 소나기가 많이 와서 분명 그 돌이 깨끗이 씻겼을 것이라고 생각하다가-즉 시적 주체는 계속해서 그 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날이 새서 돌을 버려둔 길가로 가 보았더니 놀랍게도 그 돌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대체 그 돌이 어디로 갔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시적 주체는 "처량한" 생각을 하면서 글을 짓는데, 그 글이 바로 「이런 시」로 향유되는 그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글에 대해 시적 주체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사라진 돌, 어디선가 본 듯한 돌, 시적 주체가 줄곧 생각한 돌, 사라져서 처량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그 돌을 생각하며 지은 시를 생각해 보니 사라진 돌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만 같아 시적 주체는 "그만찢어버리고싶"다고 이야기합니다. 어찌되었든 기분 좋은 감정은 아니죠. 상상 속임에도 불구하고 돌의 시선에 못 견뎌 시를 찢고 싶다는 것은 아무래도 그 시에 대한 부끄러움, 돌을 생각하면서 썼다기에는 그 시가 성에 차지 않는다는 뜻일 겁니다. 즉 "내가 그다지 사랑하는 그대여"로 시작하는 "이런시"는 "찢어버리고싶"은, 부족한 시, 부정성을 지닌 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올라가 봅시다. 이상의 「이런 시」의 "작문" 부분, 많이 향유되는 부분이 달리 읽히지 않나요? 한 부분만 볼 때 우리는 그것이 그저 아름다운 사랑시라고 생각하거나, 이상이 이런 글도 쓰는구나 하고 신기해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다릅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부분이 좋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분이 좋다'는 것과 '부분을 전체로 대체해 버리는 것'은 다릅니다. 그것은 오독입니다. 우리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초반부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을 싹틔우는 장면만 보고 "「로미오와 줄리엣」은 정말 행복한 사랑 이야기야"라고 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다른 시(?)도 한번 보겠습니다. 자꾸 시 뒤에 물음표를 붙이는 이유는 시 전체가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장미와 가시」라는 시(?)도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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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시선집 같고, 두 번째는 필사 같습니다. 둘 다 동일한 두 연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흔히 '삶은 가시밭길'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고통스럽다는 것이죠. 그런데 가시는 어디에 있나요? 장미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시가 있다는 것은? 곧 장미가 필 거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 고생 뒤에 복이 오는 것처럼요. 위 내용들만 본다면 고통스러운 삶을 장미로 은유함으로써 인생에 희망을 주는 내용 같은데요, 이제 전문을 읽어 보시죠.


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였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하고.

장미꽃이 피어난다 해도
어찌 가시의 고통을 잊을 수 있을까
해도
장미꽃이 피기만 한다면
어찌 가시의 고통을 버리지 못하리오.

눈먼 손으로
삶을 어루만지며
나는 가시투성이를 지나
장미꽃을 기다렸네.

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 송이의 장미꽃도 보지 못하였네.

그러니, 그대, 이제 말해주오,
삶은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

김승희, 장미와 가시


우리가 본 것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연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3연부터 시의 흐름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겁니다. 3연에서는 달콤한 결실(장미꽃)이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 고통을 잊을 수 있을지, 그럼에도 결실이 있기만 하다면 고통쯤이야 감내할 수 있다는 의지가 드러납니다.


그 의지는 4연에서도 이어집니다. 가시가 있다는 건 꽃이 핀다는 거야. 기다리자. 고통을 감내하자. 라고요. 그런데 5연에서, "그"가 나타납니다. "많은 가시가/돋아 있"는 "그" 말입니다. 그런데, 어라? 이상합니다. 장미꽃이 보이지 않습니다. 한 송이도 없습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했는데,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는데, 가시가 있으면 장미가 핀다고 했는데. 저렇게 가시가 많은 그의 몸에는 어째서 장미 한 송이조차 없는 걸까요.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마지막 연에 다다릅니다. 삶은 대체 무엇이냐고요. 가시장미인지, 가시가 돋아난 '장미'인지, 장미에 딸린 '가시'인지, 혹은 '장미'의 '가시'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장미'와' 가시인지를요. 여기서 장미와 가시를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고생과 낙 같은 것으로 바꾸어 읽어 보아도 좋겠습니다. 고생과 낙은 서로에게 속한 것인가요? 혹은 동등한가요? 혹은 고생뿐인가요? 알 수 없습니다. 고생을 인풋으로 넣었을 때 낙이 아웃풋으로 딱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삶은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고통뿐인 삶도 있고, 고통에서 배우는 삶도 있고, 낙을 달성하는 삶도 있고, 모르는 것입니다. 그게 오히려 이 시가 말하려는 바입니다.


그런데 첫 두 연만 읽으면 어떻게 되나요? 이 시는 '고생 끝에 낙이 온다'라는 주제로 끝나버립니다. 그렇지만 정작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정반대입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삶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합니다. 시를 전체적으로 읽어야 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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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멋진 케이크가 있습니다. 시트에는 체리를 넣었고 생크림을 사이에 바르고 초콜릿을 끼얹고 딸기와 라즈베리를 얹었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이 케이크는 어떤 케이크일까요? 체리 케이크? 딸기 케이크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초코 케이크라고 하기도 모자랍니다. 라즈베리 케이크라고도 하기도 그렇죠. 그것만으로는 이 케이크의 이름을 붙이기에는 부족할 겁니다.


시는 언어로 만들어진 구조물이라고 말했습니다. 행과 연, 문장과 단어가 맞물려서 한 편의 시가 만들어집니다. 누군가 저 케이크 위에 얹힌 라즈베리를 집어먹고 "이건 라즈베리 케이크야!"라고 말한다면 말도 안 된다고 할 겁니다.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케이크를 먹었을 때 라즈베리가 가장 좋을 수는 있습니다. 크림이 가장 마음에 들 수도 있죠. 하지만 우리가 케이크를 먹을 때 포크로 푹 퍼서 전체를 맛보고 난 후 판단하는 것처럼, 시 또한 전체적으로 본 이후에 판단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케이크의 맛을 알 수 있듯 시의 맛도 제대로 알 수 있을 겁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시를 읽어 봅시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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