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 처음으로 받은 것: 김춘수, 꽃

우리는 간혹 새 선물을 주고받기도 합니다

by 난란

이번에 읽어볼 시는 김춘수의 「꽃」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라는 구절이 오랫동안 남는 작품이죠. 이름을 붙이는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생각할 때는 이 시가 꼭 생각납니다. 좋아하는 노래 중에 이소라의 「Track 9」도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날 만났고 내가 짓지도 않은 이 이름으로 불렸네…"라고 말이죠.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그 존재를 이르는 것은 이름일 테고,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인식하는 첫 번째 단계이자 태어나 처음으로 받은 선물이 바로 이름일 겁니다. 이름은 말 그대로 각자에게 부여된 것이기도 하지만, "이르다"라는 술어의 명사형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특정한 무엇으로 말함으로써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죠.


90년대 전국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희대의 탈옥수 신창원도 이렇게 말했죠. "지금 나를 잡으려고 군대까지 동원하고 엄청난 돈을 쓰는데 나 같은 놈이 태어나지 않는 방법이 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너 착한 놈이다’ 하고 머리 한 번만 쓸어 주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5학년 때 선생님이 ‘이 새끼야, 돈 안 가져왔는데 뭐 하러 학교 와, 빨리 꺼져’ 하고 소리쳤는데 그때부터 마음속에 악마가 생겼다."라고요.


물론 '그런 소리를 들어도 그렇게 안 자라는 사람도 많다'고 대꾸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말이 상처가 되지 않을 거라고 말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우리는 타인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말하느냐에 너무나도 취약한 사회적 동물이니까요.


그러면 이제 김춘수에 대해 알아 봅시다. 김춘수는 1922년에 태어나 2004년에 타계했습니다. 앞서 다루었던 시인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를 살아간 인물이기도 하죠. 5년제 중학교 졸업을 석 달 앞두고 자퇴한 김춘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1940년 니혼대학 예과에 입학합니다. 예과 1학년을 수료할 무렵, 20살의 김춘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를 읽고 시를 쓰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김춘수는 자신의 시에 릴케가 영향을 주었다고 인정하는데,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에게도 심취했다고 서술합니다.


릴케와 키에르케고르처럼 시인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는 인물들의 글이나 사상을 익히면 시인의 시를 해석하는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윤동주의 시에도 나오는 릴케처럼 여러 시인에게 영향을 준 인물의 작품을 읽고 다른 시인들의 작품을 읽으면 이런 부분이 비슷하지만 또 이렇게 변화했구나, 이것이 이 시인의 개성이구나, 하는 독서가 가능합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읽은 만큼 더 넓고 깊게 읽을 수 있습니다. 실컷 읽고, 각각의 글의 관계를 파악해 봅시다.


다시 김춘수로 돌아옵시다. 김춘수는 1942년 가와사키 시 부두에서 일본 천황과 일제의 총독 정치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불경죄로 세다가야 경찰서에 유치되다 서울로 송치됩니다. 1945년 고향 통영에서 유치환, 윤이상, 김상옥 등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하고 예술운동을 펼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합니다. 통영중학교, 마산중학교 교사로 부임하다 경남대학교, 경북대학교, 영남대학교로 옮겨 교수직을 지냅니다.


김춘수의 시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오늘 읽을 「꽃」일 겁니다. 이해하기 많이 어렵지 않고 우리들의 가슴에 곧바로 날아들지만, 문학사에서 김춘수는 '무의미시'를 추구한 시인으로 더 유명합니다. 시는 관념 이전의 세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일차적 과제로 시에서 의미, 관념을 배제하는 '무의미시'를 시도하였죠. 그의 무의미시는 이상의 시가 떠오를 정도로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합니다.


왜 굳이 의미를 없애려고 했느냐고 물으신다면, 김춘수는 역사와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이 언어의 관념성, 고정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정된 의미를 벗겨냄으로써 문학적 저항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김춘수의 시론전집을 읽어 보시면 시 한 편을 쓰면서 얼마나 많은 생각과 고민을 거쳤는지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오늘은 「꽃」을 읽을 예정이지만, 김춘수의 무의미시가 궁금하신 분들은 「처용단장」 연작시와 더불어 시론전집을 함께 읽어도 좋겠습니다. 자, 그러면 「꽃」을 읽어 봅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


자, 어떤가요? 좋지 않습니까? 먼저 1연과 2연이 상당히 유사한 걸 볼 수 있습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전제와 그에 대한 결과가 두 행으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두 연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요. 유사한 것이 반복될 때, 그리고 그것이 완전히 같지 않을 때, 차이가 강조됩니다. "그는" 동일하지만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는 것입니다. 한정적이었던 존재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그 의미는 "나"와의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두드러진다는 것이지요.


"몸짓에 지나지 않"던 "그"는 "꽃"이 되었습니다. 이 극적인 변화의 전제는 무엇일까요? "이름을 불러 준 것"이죠. 변화의 전제는 명명(命名)입니다. 이름을 붙임으로써 의미 없는 몸짓은 색과 향기를 가진 생명으로 변화합니다.


그러나 단지 이름을 붙이는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구요? 3연으로 넘어갑시다.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시적 화자는 "그"에게 그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붙였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꽃"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나"에게 온 것처럼, "나"도 "나의 이름"을 불러줄 누군가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이름만을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관계를 원하는 것이지요.


마지막 연에 이르러 "우리들"이 나타납니다. "우리들"은 누구일가요? "무엇"이 되지 못한 이들,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 이들일 겁니다. 이름 붙이기는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며, "나"의 의미는 타인을 통해 부여받게 됩니다. '자칭'이라는 말이 공허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불러 주지 않는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의 의미가 어떻게 바뀌는지도 꼼꼼히 살펴 봅시다. 2행의 "그"와 5행의 "그"는 동일한가요? "몸짓"인 "그"와 "꽃"인 "그"는 다릅니다. 내가 이름을 불러 준 7행의 "그"와 내 이름을 불러줄 10행의 "그"도 다르죠.


4연에 이르러 "우리들"은 "나"와 "그"가 아니라 "나"와 "너"가 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름을 붙여 준다면, 그것도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붙여 준다면 상대방은 더 이상 3인칭이 아닙니다. 2인칭 "너"가 되어 "잊혀지지 않는", 무엇이 되나요? "하나의 눈짓"이 될 겁니다.


"눈짓"은 "몸짓"과 다릅니다. 방향도 의미도 추상적이고 명확하지 않던 "몸짓"은 "눈짓"이 되면서 명확한 대상이 생깁니다. 전달하려는 의미가 뚜렷해집니다. 갈 곳을 잃던 몸은 눈으로 집약됩니다. "몸짓"은 "눈짓"이 되어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나"와 "그", 각각 두 개의 몸짓은 "우리들"이 되어 "하나의 눈짓"이 됩니다. 「꽃」은 이름을 통해 자아와 의미,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타인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넓게 읽어 봅시다. "사람은 완전히 자신만으로 살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다면, 답은 '아니오' 입니다. 이 맥락에서 정신분석학적 주체 형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 봅시다. (김승희, 『4분의 1의 나와 4분의 3의 당신』)


어린 시절 우리는 스스로를 이상적으로 생각합니다. 이를 정신분석학에서는 이상적 자아라고 말하며, 상상적 에고(ego), 상상적 나로도 이야기합니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쳤을까요? 지금은 차마 입 밖으로도 못 꺼내는 원대한 꿈을 아무렇지도 않게 장래희망란에 적어놓았었죠.


그러나 한편으로 실제 자신보다 더 이상적인 환상적 자아는 나 자신에 의해서만 생긴 것은 아닙니다. 주변 사람들의 꿈과 사랑, 욕망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책의 제목처럼 1/4의 나와 3/4의 타자로 인해 1이라는 자아가 만들어지는 것(1/4+3/4=1)이죠. 이 때의 타자는 그/그녀와 같은 객관적 3인칭이 아니라 '나'와 분리되지 않는 2인칭의 당신입니다. 나와의 관계가 깊고 분리되지 않아야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요. 조금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쉽게 생각해 봅시다.


아이들은 자신을 사랑하고 보살펴 주고 자신에게 기대하는 바에 좌우되는 경향이 큽니다. 어린이는 혼자 살아갈 수 없고, 주변 환경과 어른들의 돌봄으로 자라니까요. 공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집안, 돈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집안, 건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집안,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집안에서 자란 아이들은 각각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꿈을 품을 겁니다. 나는 변호사가 될 거야, 나는 CEO가 될 거야, 나는 똑똑해, 나는 기발해와 같이 나는 어떤 사람이며, 어떤 자신으로 살고 싶은지 말입니다.


우리는 천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환경에서 태어나 같은 유전자를 가진 일란성 쌍둥이조차도 완전히 똑같지 않고 다르다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천성만으로 모든 것이 좌우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능력을 타고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갈고 닦을 환경이나 노력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십분 발휘하지 못하거나, 아예 사장되어 버릴 겁니다. 천재성을 가진 어린이가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해 평범한 어른이 되는 경우도 왕왕 있듯이 말입니다.


즉 1/4이 천성, 자신이라면 3/4은 환경, 타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 요소들이 합해서 한 사람을 이룬다고 생각한다면 그리 어려운 관점은 아닙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1/4의 나와 3/4의 당신의 관계는 유지됩니다. 다만 '나'가 속한 사회의 반경이 커지면서 집에서 벗어나 사회로 확장되지요. 그렇게 "우리 애는 천재가 아닐까?"라는 보호자의 말이 너무나 익숙하던 '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됩니다. 환상은 깨집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사회적 주체로 살아갈 수 있죠. 이제 3/4은 인습, 제도, 풍속이 됩니다. 여자는 이래야지, 남자는 저래야지, 누나, 언니, 형, 오빠라면 마땅히 이래야지, 신입이라면, 결혼을 했으면, 나이가 30이면 등 수없이 많은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름은 무엇인가요? 이름은 우리가 태어나 처음으로 받은 선물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라, 이런 삶을 살아라라는 타인의 바람이 깃들어 있는 일종의 마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우리가 받은 수많은 이름은, 타인의 바람은 우리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새로운 이름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지어줄, 그리고 불러줄 누군가를 바라게 되지요.


이제 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나에게 이름은 어떤 의미를 지니나요? 나에게 이름을 붙여준 타인은 존재하였나요? 그는 누구인가요? 혹은 누군가에게 이름을 붙여준 적이 있나요? 그 이름은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이었나요? 이름 붙이기에 대한 경험은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고, 어떤 의미가 되었나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발코니 장면은 이름에 대한 오늘의 이야기와 함께 보기에 더없이 좋은 텍스트입니다. 몬태규 가의 로미오와 캐퓰렛 가의 줄리엣의 사랑은 가문 간의 분쟁으로 가로막힙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름을 버리고 서로를 통해 새 이름을 얻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말이죠.


오 로미오, 로미오, 왜 당신은 로미오인가요?
당신 아버지를 부인하고, 당신 이름을 거절하세요.
당신이 그러지 않겠다면, 날 사랑한다고만 맹세하세요,
그러면 난 더 이상 캐퓰릿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을 거예요.
당신 이름만이 나의 적일 뿐이에요.
당신이 몬태규가 아닌들, 당신은 변함없이 당신이잖아요.
몬태규란 무엇인가요? 그건 손도, 발도 아니며,
팔도, 얼굴도 아니고, 사람의 어느 부분도 아니에요.
제발 다른 이름이 되세요.
이름 속에 무엇이 있나요? 우리가 장미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이름으로 불려도 향기롭기는 마찬가지잖아요.
그러니 로미오도 로미오라 불리지 않더라도,
그 이름이 없어도 원래 가진 사랑스러운 완벽함은 그대로일 테니까요.
그러니 로미오, 당신 이름을 버리세요,
당신의 어느 부분도 아닌 그 이름을 버리고 내 모두를 가지세요.

그대 말대로 하리다.
나를 사랑이라고 불러 주오!
나는 새로 세례를 받았으니,
이제 다시는 로미오가 되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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