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이란 참여의 반대일까요?
지난 번 박두진의 「해」를 읽으면서 나누었던 이야기 기억하시나요? 순수(서정)과 현실(참여)가 반대 개념처럼 사용되는 것에 대해 저는 그렇지도, 그럴 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오늘은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조금 더 깊이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순수문학이라든가 서정시라든가 하는 것은 뭐랄까, 말랑말랑하고, 울먹울먹하고, 내면을 바라보고, 어쨌든 자기 밖보다는 자기 안에 집중한다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반대로 참여문학이라든가 하는 것은 눈물을 박박 닦고 밖으로 나가 현실에 집중한다는 느낌이 들 수 있죠. 세상은 '혼탁'하지만 내면은 '순수'해 보이고 말입니다. 그러나 바로 지난 글에서 주체란 1/4의 나와 3/4의 타자로 인해 구성된다는 말을 떠올린다면 과연 내면이란 '현실'과 격리되어 '순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봄직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읽을 시는 김광섭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김광섭에 대해서 알아보아야겠죠. 김광섭은 1904년에 태어나 1977년에 별세합니다. 1904년이라면 고종이 통치했던 시기였습니다. 조선시대에서부터 대한민국까지 살아간 인물인 것이죠. 김광섭은 1926년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합니다. 같은 대학 불문과 이헌구와 친구가 되고 정인섭과도 알게 되어 해외문학연구회에 함께합니다. 1927년에는 와세다대학의 조선인 동창회지 『R』에 시 「모기장」을 발표하면서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1933년에는 『삼천리』에 「현대영길리시단現代英吉利詩壇」을 번역하고 시 「개 있는 풍경」을, 동아일보에 「문단 빈곤과 문인의 생활」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영길리英吉利'는 영국을 한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대어로는 「현대영국시단」 으로 읽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1933년에만 번역, 시 창작, 평론을 두루 발표한 거죠. 게다가 1933년은 모교인 중동학교의 영어교사로 부임한 해이기도 합니다.
이후 수필, 영문학, 시, 평론 등 여러 분야에 걸쳐 활동했고 1937년에는 극예술연구회에 참가해 연극운동에도 힘씁니다. 그러던 와중 1941년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는 죄목으로 붙잡혀 3년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다 광복 이후 풀려나게 됩니다. 광복 이후에는 중앙문화협회 창립, 전조선문필가협회 총무부장, 민주일보 사회부장,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출판부장, 민중일보 편집국장, 미군청정 공보국장, 이승만 공보비서관까지 지내면서 정치 활동에도 참여하게 되죠.
이후 경희대학교 교수로 잠시 재직한 후 꾸준히 시를 씁니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성북동 비둘기』도 후기에 쓰인 시입니다. 일제시대 주요감시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김광섭의 사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기도 했습니다. 자, 이제 「마음」을 읽어 봅시다.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나리고
숲은 말없이 잠드나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김광섭, 마음
자, 어떤가요? 첫 연부터 차근차근 읽어 봅시다. "나의 마음"은 무엇에 비유되나요? "고요한 물결"입니다. 그렇다면 왜 화자는 자신의 마음을 산도 별도 해도 아닌 "고요한 물결"에 빗대었을까요? "고요한 물결"의 속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음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구름이 지나도 그림자 지는" 것이 바로 "고요한 물결"입니다. 흔들리고, 상처받고, 자국이 남는 얇은 물결을 떠올려 봅시다.
이 얇고 연약한 물결에 무엇이 등장하나요? 바로 2연의 "돌을 던지는 사람/고기를 낚는 사람/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물에 돌을 던지면 어떻게 되나요? 몇십 겹의 동그란 파문이 일 겁니다. 낚싯대를 드리우면요? 물고기와 수면이 흔들리겠죠. 2연의 각 행에서 제시된 "사람"들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점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지니는지 생각해 봅시다.
3연에 다다르면 "물결"의 특성이 조금 더 뚜렷해집니다. "물결", "물가"는 어디에 있나요? "숲"에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숲 안에 있는, 고기를 낚을 수 있을 정도의, 밤에는 사람이 없어 쓸쓸한 호수를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3연의 풍경을 상상해 봅시다. 인적 없는 호숫가는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도 나지 않고, 검은 물 위로 조용히 내려앉는 희고 총총한 별을 말이죠. "나의 마음"인 "물결"은 낮과 달리 고요해졌습니다.
4연에서는 "나"가 등장합니다. "나"는 무엇을 하나요? "꿈을 덮"습니다. 계속 질문해 봅시다. 왜 꿈을 덮죠? 왜 꿈이어야 할까요? 먼저 꿈을 덮는 이유는 11행에 나타납니다. "이 물가 어지러울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물가가 어지럽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1연으로 돌아가 보죠. "마음"인 "고요한 물결"이 흔들리거나 그림자가 지는 것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은 왜 흔들리면 안 되나요? "백조"가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백조는 우리도 압니다. 희고 목이 길고 우아한 새죠. "나"의 "마음"인 "물결"에 내려올 아름다운 "백조"를 위해 "나"는 밤마다 꿈을 덮습니다. 그러나 "백조"가 반드시 올 지 안 올지는 모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행여"라는 것은 어쩌다가, 혹시, 올 수도 있도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백조"를 기다리며 "밤마다 꿈을 덮"습니다. 그러므로 꿈을 덮는다는 것은 백조가 오리라는 믿음을 내포합니다.
또 백조는 날짐승이죠. 위상位相으로 따진다면 "나"의 마음을 표상하는 "호수"는 아래(땅)에 있고 "백조"는 위(하늘)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백조를 맞이하려는 "나"의 마음에는 일종의 경외심 또한 있으리라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더 생각해 봅시다. "나"의 "마음"이 "호수"라는 자연물이라는 것, "백조" 또한 "사람"보다 자연에 가깝다는 것도 생각본다면, 그리고 이런 관점을 확장한다면 나/백조/사람/별/숲과 같은 시의 여러 요소들의 관계와 이로 인한 의미를 추출해낼 수도 있을 겁니다. 시적 대상의 위상, 특성을 따져 보면서 시를 읽으면 시의 의미를 촘촘하게 엮어낼 수 있습니다. 이게 시 읽기의 재미죠.
자,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왜 하필 "꿈"을 덮을까요? 덮으려면 이불도 있고 보자기도 있고 뚜껑도 있을 텐데요. 하지만 여러분은 앞서 꼽은 물건들을 읽으면서 생각했을 겁니다. 아, 그건 아니지. 일단 호수를 덮을 만치 큰 뚜껑도 없을 뿐더러 "나"가 기다리는 "백조"를 위해 뚜껑을 덮을 순 없지요. 이불이나 보자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조가 노닐어야 하는데 호수에 이불을 덮으면 백조가 오겠나요? 그리고 뭔가, 뭔가…뭔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 겁니다. 상서로운 듯한 백조를 위해 황금을 덮 것도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조명도 마찬가지죠. 고요한 물결이 정신사나워지잖아요. 백조를 위해 무엇을 덮어야 좋을까? 어지럽지 않은 고요한 마음을 갖추기 해서는 무엇이 가장 적절할까? 깊이 고민해 본다면 여러분도 시를 쓸 수 있는 태도가 갖춰진 겁니다.
꿈, 적절해 보입니다. 보이지도 않고 팔 수도 없는 것이지만 동시에 살 수도 없는 것이고 "나"에게는 무엇보다 귀중한 것이니까요. 밤에 꾸는 꿈일까요, 마음에 품었던 꿈일까요? 혹은 둘 다일까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다른 시 한 편을 읽어 봅시다. 아일랜드의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를 말이죠. 예이츠를 처음 들어 본다는 분도 있을 텐데요, 1923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예이츠의 유명한 작품으로는 「이니스프리 호수 섬The Lake Isle of Innisfree」가 있습니다. 자연 친화적 이미지로 유명한 화장품 회사의 이름도 여기서 따왔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이 시가 아니라 다른 시를 읽어 볼 겁니다. 「He wishes for the cloths of heaven」으로, 직역하자면 「그는 천국의 천을 소망한다」정도가 될 텐데요, 「하늘의 천」으로 더 유명합니다.
Had I the heaven's embroidered cloths,
Enwrought with golden and silver light,
The blue and the dim and the dark cloths
Of night and light and the half light,
I would spread the cloths under your feet;
But I, being poor, have only my dreams;
I have spread my dreams under your feet;
Tread softly because you tread on my dreams.
내게 금빛과 은빛으로 짠
하늘의 천이 있다면
어둠과 빛과 어스름으로 수놓은
파랗고 희뿌옇고 검은 천이 있다면
그 천을 그대 발 아래 깔아드리련만,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이 꿈뿐이라
내 꿈을 그대 발 아래 깔았습니다.
고이 밟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자, 어떤가요? 예이츠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준 시인으로, 김소월의 스승인 김억이 예이츠의 시를 번역했고, 김억뿐 아니라 김소월, 김영랑, 백석도 그의 시에 영향을 받았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더 알고 싶다면 논문이나 연구서를 찾아 보는 것도 추천합니다. 조금만 더 이야기하자면 예이츠의 시가 조선에 큰 영향을 준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노벨 문학상을 받기도 했지만,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이랜드인으로서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아일랜드의 전통, 신하와 전설의 가치를 중요시하면서 문화를 통한 민족 공동체의 가능성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김광섭의 시와 예이츠의 관계를 추측해 볼 수 있을 겁니다. 금빛과 은빛으로 짠, 어둠과 빛과 어스름으로 수놓은 천이 있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전설 같은 물건일 겁니다. 그러나 그 엄청난 천으로 "나"가 하려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대"의 발 아래 까는 것입니다. 그대에 대한 나의 마음과 더불어 그대가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도 파악할 수 있죠. 그러나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이 꿈뿐"이니 "나"의 모든 것인 꿈을 발밑에 까는 것으로 마음을 표현할 뿐입니다. 이렇게 "백조"에 대한 "나"의 마음과 "그대"에 대한 "나"의 마음을 겹쳐 읽으면 그 의미가 배가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도 읽었고, 세세히 뜯어 보았고, 뜻을 파악하기 위해 다른 텍스트까지 연결하여 읽어 보았습니다. 자, 그러면 이 시는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일까요? "「마음」은 맑은 물과 백조의 조응을 통하여 한 생명의 실상을 읊은 것이다"라는 해설이 있는데, 다소 추상적입니다. 생명의 실상이란 무엇인가요? 생명 자체에 대한 어떤 핵심을 말하려고 한 것일까요? 해당 해설의 뒷문장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해바라기」는 높은 이념을 해로써 상징하고 민족의 지표를 제시한 것이었다." 그러면 「해바라기」가 「마음」보다는 민족의식과 조국애가 상대적으로 덜 나타난다는 의미일 겁니다. 그런가요? 다른 해설도 한번 읽어 봅시다. "작자가 오랜 어둠 속에서 고대하던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속의 해방은 마침내 작자로 하여금 '해방의 노래'를 부르게 한다." 이 해설은 「마음」을 "해방의 노래"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뭐가 맞는 걸까요?
조금 더 알아 봅시다. 「마음」은 1939년 발표되었습니다. 「마음」을 표제시로 삼은 시집 『마음』은 1949년 발간되었고요. 그리고 『마음』의 서문, 시로 들어가기 전 앞에 적힌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주 무덤에 황토를 덮고
나는 원한다
꽃들아
네 맘대로 피어라
나는 시인이 번영치 못하는
시간에 왔다 간다.
우리가 흔히 '텍스트text'라고 말하는 것은 좁은 의미로는 문자로 이루어진 책이나 잡지 등을 말하지만, 넓게 볼 때 텍스트는 반드시 문자로 이루어진 것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해석의 대상이 되는 것, 의미를 만드는 것을 통틀어 텍스트라고 말하죠. 바르트는 "텍스트들은 의미를 만들고, 의미는 삶을 만든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의미를 만듦으로써 궁극적으로 삶을 만드는 것은 텍스트라고 이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집을 읽는다고 할 때 우리는 보통 엮인 시를 텍스트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집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곁에 시집이 있다면 한번 펼쳐 보세요. 그리고 찬찬히 뜯어 봅시다.
시집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나요? 내 손에 있는 시집은 다른 시집과 어떻게 다른가요? 단어의 의미란 그 자체로 고유한 것이 아니라 다른 단어와의 차이에서 발생한다고 했듯,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집의 표지는 빨갛고, 글씨는 돋움체이고, 굵음 처리되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시집을 펼쳐 보니 책날개에 시인에 대한 설명이 있네요. 어떤 내용인가요? 각자 다를 겁니다. 한 장 한 장 넘기면 시 이전에 또 무언가 있습니다. 최근 시집에는 '시인의 말'이 있습니다. 가끔 서문이 있기도 합니다. 시집 뒤에는? 해설이나 평론이 붙어 있기도 하죠.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의미가 됩니다. 독자가 책을 읽음으로써 의미를 구축하는 데 영향을 줍니다. 이러한 것들을 파라텍스트paratext라고 합니다. 준準이라는 의미를 가진 접두사 para-에 text가 붙었죠. 텍스트에 준하는 텍스트, 작품 본문이나 대화 텍스트의 주변에 위치한 텍스트를 파라텍스트라고 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서문을 고려하면서 「마음」을 읽어낼 수 있을 겁니다. 「마음」 자체에는 두드러지는 민족애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김광섭의 당시 삶, 이를 표제시로 삼은 시집 『마음』의 서문에는 분명 "시인이 번영치 못하는 시간"이라는 인식이 분명히 담겨 있습니다.
자, "시인이 번영치 못하는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이 말을 들어 보신 적 있나요?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다Nach Auschwitz ein Gedicht zu schreiben, ist barbarisch." 말이죠.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의 발언은 2차대전 이후 인간에 의한 인간의 학살과 문학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것으로 읽힙니다. 세상이 이 따위인데 무슨 놈의 시야, 다 망했어, 다 위선이야. 때려치우자. 그런 뜻인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도르노는 서정시에 대해서 1991년 「서정시와 사회에 대하여On Lylic Poetry and Society」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사회로부터 서정시를 연역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것의 사회적 실체는 정확히 그 안에 자발적으로 있는 것, 바로 그 때의 조건에서 따라 나오지는 않는 것이다. (...)
바로 자신의 주관성 탓에 서정시의 실체는 객관적 실체로서 말해질 수 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우리는 서정시를 예술 장르로서 근거지을 수 있는 바로 그 사실, 서정시가 독백을 늘어놓는 시인을 넘어 다른 이들에게 효력을 발휘한다는 점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의 자기 자신으로의 물러남, 스스로에의 몰두, 사회적 표면으로부터 떨어져 나옴이야말로 시인의 등뒤에서 작용하는 사회적인 원인이다. (...)
서정시의 특유한 역설, 객관성이 되어버린 주관성이라는 것은 서정시 안에서 언어 형태의 선차성과 결합되어 있다. 문학 일반에서의 언어의 선차성이 파생되는 그 선차성이다. (...) 이것이 왜 서정시가 사회를 끌어들이며 옥신각신하지 않을 때, 아무것도 의사소통하지 않을 때, 자신의 표현에 성공하는 주체가 언어 그 자체와 일치하고 언어의 내재적 경향과 일치할 때 사회 속에 가장 깊이 근거하게 되는가의 이유이다.
조금 복잡하지만 차분히 읽어 봅시다. 아도르노는 기본적으로 서정시 내부에 사회적 실체가 이미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개인의 내면을 다루는 듯한 서정시는 주관적인 것으로 보이나, 만일 서정시가 정말로 '주관적'이고 '개인적'이기만 하다면 시가 어떻게 작가 개인이 아닌 다른 사람, 독자에게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인이 현실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면, 그 또한 현실 문제의 결과라는 것을 지적합니다. 또한 언어란 기본적으로 사회적 산물이며, 문학은 먼저 언어가 존재해야 가능하기 때문에 서정시가 사회와 유리되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아도르노의 논의입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다"라는 말이 너무 강렬했던 탓인지, 많은 사람들이 아도르노의 발언을 아우슈비츠의 참상으로 인해 시란 비도덕적이거나 불가능하다는 의미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2001년 『형이상학Metaphysics』에서 이에 대해 다시 언급해야만 했죠.
나는 아우슈비츠 이후로는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말이 논쟁을 야기시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그것이 철학의 본질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쓰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철학이다. 그것이 소위 철학적인 주제와 관련이 없더라도 말이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철학은 항상 경향과 관련되며, 사실의 진술로 구성되지 않는다.
철학을 잘못 이해한 것은 모든 강력한 과학적 성향에 대한 친밀도가 높아진 탓으로,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아우슈비츠 이후로는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다’고 썼기 때문에 시를 쓸 수 없으며, 만약 시를 쓴다면 ‘나쁜 사람이거나 냉혈한이거나, 잘못 쓴 것이거나,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을 말했다’라고 생각하는데, 글쎄, (…) 내가 그 말을 한 것은, 그 당시 문화의 부활의 공허함을 지적하고자 했던 것이라는 측면에서 나의 발언을 인정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사이에 고통에 대한 인식이 있는 한 그 인식의 객관적인 형태로서의 예술 또한 있어야 한다는 헤겔의 미학적 진술에 의해서라도 시를 써야 할 것이다.
(…) 사르트르의 가장 중요한 연극들 중 하나가 말한 것을 형이상학적 질문으로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극에서] 고문을 당하는 젊은 레지스탕스가 뼈가 으스러질 때까지 맞는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묻는다. 그것은 삶에 대한 어떤 긍정의 가능성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 질문은 피할 수 없다.
나는 이 기준에 판단되지 않고 이론적으로 동화되지 않는 어떠한 사상도, 그야말로 사상이 말해야만 하는 것을 처음부터 제쳐둔 것이며, 그것은 결코 사상이라고 불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 정리해 봅시다. 아도르노의 입장에 따르면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다"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본인이 철학자이며 본인의 발언은 모두 철학적이므로 표현된 문자뿐만이 아니라 그 맥락까지 살펴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문자 그대로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이 참상을 겪었음에도 아름다운 환상을 노래하는 것이 야만이며, 오히려 고통에 대한 인식의 형태로서 예술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어째서 살아야만 하는지에 대한 질문, 삶에 대한 어떠한 긍정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사상은 가치가 없다고도 말하죠.
그렇다면 우리도 흔들리는 물결 같은 마음으로 백조를 위해 꿈을 덮는 김광섭의 「마음」을 단순히 "생명의 실상"이라고만 읽을 수는 없을 겁니다. "시인이 번영치 못하는 시간에/왔다 간다"고 한탄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함께 읽어야겠지요. 우리는 조금 더 넓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흔들리는 물결, 내면성을 다루는 것을 그저 내면으로의 침잠이나 도피로 치부하지 않고 보다 섬세하게 읽어내는 것은 서정(순수)과 현실(참여)이란 상극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야만 가능할 겁니다.
백조도 오지 않는 외롭고 쓸쓸한 곳에서 돌멩이 하나에도 흔들리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을 덮는다는 시를 쓰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에게 남은 것이 꿈뿐이라면 그 꿈을 엮어내는 것은 회피에 불과할까요? 생각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