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개적으로, 메타적으로 읽기: 기형도, 안개

우리는 정말 무고한가요?

by 난란


이번 글의 일부분은 제 매거진 <아직은 시의 영토>에서 가져왔습니다. 한국 시뿐 아니라 외국 시에 대한 보다 자유로운 감상과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한번 살펴 보셔도 좋겠습니다.



문학은 독자에게 즉시 다가오지 못합니다. 동시대 작가의 작품을 읽는다고 하더라도 제작 시기와 출간 시기의 격차는 생길 수밖에 없죠. 그러나 우리는 동시대 작가의 작품뿐만 아니라 몇 십, 혹은 몇백년 전 작품까지 읽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때 살았던 사람도 아닌데요. 또 생각해 보면, 작가와 동시대를 산다고 할지라도 작가의 삶을 살아 보지 못하는 우리는 그의 경험에 기반한 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왜냐하면 우리는 매개적 사고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닌 지식과 문화를 매개로 상황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나'가 아닌 '타인'의 삶과 말과 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요. 김광섭의 시를 읽을 때 이 시는 일제강점기에 쓰였구나, 이 때는 김광섭이 투옥된 시기였구나, 이런 경험을 했구나, 그렇다면 이런 뜻이겠구나 하는 식으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메타적 사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야콥슨의 의사소통모델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더 높은', '상위의' 라는 뜻을 지닌 메타meta는 현재의 상황에 맞게 변용하여 자기화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시를 읽고 자신의 삶에 대입할 수 있다는 건 '과거의' 책을 통해 '현재의' 삶의 길잡이를 삼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게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이기도 할 거고요.


이런 맥락에서, 오늘은 기형도의 「안개」를 읽어 봅시다. 젊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기형도의 등단작이기도 한 이 시를 읽기 전에 먼저 기형도에 대해 알아 봐야겠지요. 기형도는 1960년에 태어났습니다. 기형도의 아버지는 황해도 출신으로,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쪽으로 건너왔습니다. 집안은 유복한 편이었으나 아홉 살 때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열다섯 살에는 손윗누이가 사망하면서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지요.


이후 연세대학교 정법에 입학한 후 교내 문학 서클 <연세문학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합니다. 교내 신문에서 시상하는 박영준문학상에 가작으로 입선하기도 했습니다. 일 년 후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하고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자 대학생을 중심으로 구성된 민주화 시위 농성에 참여하고 교내지에 「노마네 마을의 개」를 기고했다가 조사를 받기도 하죠.


1984년 중앙일보사에 입사한 기형도는 1985년 「안개」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2월에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후 정치부에서 근무하게 됩니다. 다음 해에는 문화부로 자리를 옮기고, 1988년에는 편집부로 자리를 옮긴 기형도는 1989년 3월 7일 종로의 심야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숨집니다. 익히 알려진 『잎 속의 검은 잎』도 유고시집으로,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은 일 년 뒤 출간됩니다. 너무 일찍 떠나간 기형도는 아쉽지만 우리 곁에 남은 시를 소중히 생각하며 시를 읽어 봅시다.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 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 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 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銃身)을 겨눈다.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기형도, 안개


생각보다 길지만 그렇게 어렵지는 않지요? 조금 특이하게도 세 부분으로 나뉘었지요. 왜 세 부분으로 나뉘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시 전체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안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겠죠. 자, 1부터 차근차근 읽어 봅시다.


1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라는 공간적 배경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2에서는 "안개"가 끼는 "샛강"이 어떤 곳인지에 대한 설명이 제시됩니다. "샛강"은 "이 읍"에 들어오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입니다. "처음 와 본 사람"은 "거대한 안개의 강"에서 앞서간 사람들이 사라질 때까지 서 있어야 합니다.


무엇처럼요? "쓸쓸한 가축"처럼 서 있어야 합니다. 가축은 필요에 의해 길들여진 동물이죠. 가라면 가고 오라면 와야 합니다. 즉 이 읍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자욱한 안개 속에서 가축이 되는 통과의례를 치러야 합니다. 언제까지 서 있어야 하나요?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요. 경악이 나올 정도의 고립감은 "사람"을 "가축"으로 만듭니다. 자욱한 안개는 곁에 있는 사람을 흐리게 만들고, 끝내 개인을 소외시킴으로써 말 잘 듣는 가축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안개의 특징을 하나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고립시킨다는 것.


다음 연으로 넘어가면서 배경은 읍 안으로 바뀝니다.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안개의 군단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서술을 통해 우리는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과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에 주목할 수 있죠. "공중"은 어째서 "두꺼운" "종잇장"으로 표현될까요? 태양은 어째서 "노랗고 딱딱"할까요? 허공이 두꺼운 종잇장이 될 때, 태양이 딱딱해질 때 어떤 느낌이 드나요? 가로막힌 듯한 느낌, 갑갑한 느낌이 들지는 않나요?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도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옵니다. 이들은 이미 읍의 주민들이기 때문에 낮까지 안개가 사라지지 않아도 일상을 살아가지요.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닐 수 있습니다. "습관"은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게 만들어 줍니다. 남들도 다 그러니까, 라는 생각과 원래 그런 거니까, 하는 생각은 "안개"의 "식구"가 되게 만들어 줍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될까요?


다음 연에서는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 등장합니다. 사람들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는 날엔, 그 "얼굴들을이 모두 낯설"어집니다. 낯선 얼굴을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버리는 것입니다. 이상합니다. 이 읍에 들어오기 전에는 앞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 홀로 남겨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경악"스러웠는데 말이죠. 이제 다른 사람의 "얼굴"은 낯설고 경계해야 할 대상이 됩니다. 왜일까요? '안개의 식구'가 되어 버렸기 때문일 겁니다.


안개의 나날이 긴 탓에 맑은 날이 낯설다면, 안개가 습관이 될 정도로 오래 지속되었다면, 반대로 안개가 없는 날에도 익숙해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야속하게도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뒤따릅니다. 잠시 맑았던 행이 무색해질 만큼, 다음 행은 안개의 힘을 더욱 극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 놓"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찹니다. "희고 딱딱"한 안개가 공기를 가득 채우면 어떻게 될까요? 상상해 봅시다. 축축하고 허옇고 수분 가득한 안개가 코와 입에 들어차는 감각을 말이죠. 안개는 식물이고 공장이고 할 것 없이 블랙홀처럼 모조리 빨아들이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을 잘라버립니다.


무시무시한 안개의 힘을 보여준 후, 다음 연에서 화자는 단언합니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고요. 한밤중에 여직공이 겁탈당한 사건, 취객 하나가 얼어 죽은 사건. 바로 그의 곁을 지나면서도 그가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는 것. 사람들이 모여 있는 "기숙사"도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안개가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서로를 낯설게 만들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것은/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라는 단언은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정말인가? 아닌 것 같은데'라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정말 안개의 탓이 아닐까? 라는 의문은 다음 연에서도 이어집니다. 의문과 함께 안개가 걷히자 보이는 것은 "공장의 검은 굴뚝들"입니다. 이 굴뚝들은 "총신銃身"으로 나타납니다. 그렇습니다. 이 읍은 사람들을 고립하고 소외시키는 안개와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공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로 인해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떠나지만 곧 잊힙니다. 이 읍, 바로 "안개의 성역"이자 "폐수의 고장"으로 영영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시는 3으로 접어듭니다. 1에서 언급된 내용이 반복됩니다.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그러나 동일하게 끝나지는 않습니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며,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읍의 사람들은요.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라는 말은 제법 안정적인 결말을 제시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요? 우리는 이 말을 믿을 수 있나요? 믿지 못합니다. 겁탈당할 위험에 처한 여공들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나요? "느릿느릿 새어 나오"던 아이들, 총신 같은 공장에 들어갈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이 어떻게 바람직할 수 있나요?


1에서 3으로 흘러가면서 "읍"의 실체는 점점 명확해집니다. 평화로워 보이던 안개는 사람을 가축으로 만들고, 사람을 소외시키며, 사람을 서로 경계하게 만들고, 무관심하게 만드는데다, 그로 인한 온갖 비극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가장 끔찍한 것은 이 비극에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안개의 주주이기 때문이죠. 괴담보다 더 괴담 같은 현실은 독자로 하여금 진저리를 치게 만듭니다.


「안개」는 처음부터 끝까지 평이한 어조로 진행됩니다. 안개는 부정적으로 그려지지만 직접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아이러니하게 안개의 편을 듦으로써 독자에게 의문을 심고, 안개와 읍의 상황을 세밀하게 그려냅니다. 우리가 퍼즐 조각을 모아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말이죠. 1970~80년대는 독재와 함께 산업화가 활발히 진행되던 시기였습니다. "총신"으로 나타나는 "공장의 검은 굴뚝"은 해당 시기를 잘 드러내는 표상입니다. 자, 그러면 2025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 시를 어떻게 읽어낼 수 있을까요? 흠, 그 땐 정말 그런 시기였지. 좋아, 그 시대를 잘 드러내는군. 하고 책을 덮어야 할까요? 조금 더 나아가 시를 현재로 끌어와 봅시다.


다시 한 번 "안개"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안개란 무엇인가요? 안개란 생활 속에 스며든 것, 습관화된 것, 타인에게 무관심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나에게 이득이 되는 것, 결국 나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내게 완전히 해가 되는 것이라면 나는, 읍의 주민들은 안개를 몰아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개는 "읍의 명물"입니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비극에 눈을 감게 되는 것이지요.


자,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이 "안개"는 지금 사라졌을까요? 아닙니다. 안개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예시를 들어 봅시다. 배달, 어떤가요? 편합니다. 정말 편하죠. 일주일을 넘게 기다려야 했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새벽배송', '총알배송', '로켓배송'이라는 말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자기 전에 주문하면 새벽에 문 앞에 상품이 배달되고, 하루 이상 걸리는 상품은 살지 말지 고민해야 할 정도죠. 그런데 정말 그것으로 괜찮은가요?


우리는 너무나도 빠르고 쉽게 물건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물건들이 하루면 문앞에 도착하고, 많이 사고 빨리 받고 많이 뜯는 것이 일종의 자랑이 되었죠. '택배 언박싱' 영상을 찍고 보며 즐거워하고, 가볍게 사고 간단히 버립니다. 그렇지만 이 빠른 소비의 말초적 즐거움은 결국 무언가를 필요로 합니다. 더 빠른 배송을 위해 더 많은 일을 요구합니다. 그러는 와중 "상처 입은" 사람들이 생겨나지요.


고강도 노동으로 숨진 쿠팡 물류센터 노동자, 주말도 쉬지 못하고 일하다 사망한 택배 기사들, 그리고 더 공포스러운 것은 주말 없는 배달에 오르는 매출앞다투어 뒤따르는 회사들입니다. 빠르고 편하고 간편하니 너도나도 빠른 배달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편하기 때문에 그것을 끊지 않습니다.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 안개는 다시 우리에게 되돌아옵니다. 'N잡'이 자연스러워진 시대에 가장 대표적인 부업은 배달이니까요.


앞서 197,80년대의 상황을 매개하여 「안개」를 이해했다면 이제 메타적 사고를 통해 2025년의 "안개"를 찾아 봅시다. "안개"는 배달 외에도 다른 형태로 여전히 잔존할 겁니다. 또 어떤 형태의 "안개"가 있을까요? 생각해 봅시다. 또, 우리가 「안개」를 읽고 "읍"의 사람들에게 품었던 생각을, "폐수의 고장"의 비극을 바라보며 느꼈던 감정을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시를 읽으며 "안개"에 대해 취한 나의 입장을 현실에 대입할 때, 무엇이 달라질까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생각할 수 있다면, 나아가 실천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그 자체로 문학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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