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나만을 사랑한다는 것 : 황지우, 뼈아픈 후회

누군가의 눈동자를 거울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by 난란

이번 글의 일부분도 제 매거진 <아직은 시의 영토>에서 가져왔습니다. <잠시: 시를 읽는 방법>보다 가볍게 시에 대한 감상을 나누고 싶으신 분들은 읽어 보셔도 좋겠습니다.



시,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시의 종류가 있다면 아마도 사랑시일 겁니다.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대표적인 고전시가인 <황조가>도 그렇죠. 고구려의 유리왕이 화희와 치희를 아내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두 아내 사이는 좋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일이죠. 다툼 끝에 치희가 궁을 떠나 유리왕이 쫓아갔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이에 슬퍼한 유리왕이 지었다는 시입니다.


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펄펄 나는 꾀꼬리는
암수가 정다운데
외로운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고대 그리스 시인인 사포도 사랑에 대한 시를 지었는데요, 기왕지사 언급하였으니 조금 더 이야기해 봅시다. '최초의 서정시인'이라고 불리는 여성인 사포는 <일리아드>, <오디세이아>로 이름 높은 호메로스와 견줄 만큼 드높은 명성을 누렸습니다. 레스보스 섬에서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해 노래와 시, 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플라톤조차 사포를 열 번째 뮤즈, 학문과 예술의 신이라고 칭송했지요. 한번 읽어 봅시다.


그녀에게서 말 한마디 듣지 못했네.
차라리 내가 죽었다면 좋았을걸.
떠나는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네.

그리고 내게 말했네.
"이 이별을 견디어야 합니다,
사포여, 나는 마지못해 떠나가니."

나는 답했다. "떠나세요, 그리고 행복하길,
하지만 기억해요 (당신도 잘 알겠죠),
사랑에 묶인 채 남겨진 사람을.

당신이 나를 잊으면, 아프로디테에게 바친
우리의 선물을 생각해요,
우리가 함께했던, 사랑스러웠던 모든 것들을.

제비꽃으로 만든 티아라와,
당신의 앳된 목을 감싸던 장미 봉오리와
딜 잎사귀, 크로커스를 엮어 만든 화관.

당신의 머리에 부어내린 몰약과,
소망하던 모든 것을 품고서
부드러운 깔개 위에 앉은 소녀들을.

우리의 목소리 없이는,
노랫소리는 들리지 않으며,
노래 없이 꽃을 피우는 봄 나무는 없다는 것을…."


어떤가요? '서정시', '사랑시'라고 하면 즉각 떠오르는 전형적인 내용이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인과의 이별로 인한 애달픈 마음을 노래하는 사포는 "우리의 목소리 없이는,/노랫소리는 들리지 않으며,/노래 없이 꽃을 피우는 봄 나무는 없다는 것을"이라고 노래합니다. 서정을 '세계의 자아화'라고 한다면, 우리의 노랫소리 없이는 봄이 오지 않으리라는 마지막 구절은 세계의 자아화 그 자체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지요.


이처럼 사랑이란 아주 오래 전부터 시의 제재가 되었습니다. 강력한 감정의 범람이 창작의 원동력이라고 할 때 사랑은 참으로 좋은 예시가 되어 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 시인이 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의미에서 오늘 읽을 시는 사랑에 대한 시, 그러나 사랑 자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시인 황지우의 「뼈아픈 후회」를 읽어 보도록 합시다.


황지우는 1952년 해남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성장합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황지우라는 이름은 필명으로, 본명은 황재우입니다.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한 후 1973년 유신 반대 시위 참여로 강제 입영됩니다. 이후 동대학원 철학과에 진학하였으나 1980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되어 1981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적당합니다. 이후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석사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미학과에 진학하게 되지요. 1980년에 「연혁」으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고, 문학과지성사에 「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를 발표하며 등단합니다. 기호, 만화, 사진 등 다양한 형식을 사용하며 풍자시로 이름을 알린 황지우는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로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고, 오늘 읽을 「뼈아픈 후회」로 김소월문학상을, 해당 시가 실린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로 백석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지요.


그러면 이제 「뼈아픈 후회」를 읽어 봅시다. 이 시는 1994년 소월시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것과 1998년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에 실린 내용이 다른데요, 어떤 부분이 같고 다른지에 집중하면서 읽어 봅시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 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의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나의 희생, 나의 자기 부정;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알을 넣어주는 바람뿐

황지우, 뼈아픈 후회 (1994)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신상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황지우, 뼈아픈 후회 (1998)


자, 어떤가요? 두 시 모두 동일하게 시작합니다. "슬프다//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모두 폐허다"라는 것이지요. 이 슬픔이 시 전체를 끌고 가는 거대한 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독자는 첫 부분에서부터 생각합니다. 어떻게 사랑한 모든 자리가 폐허일 수 있을까? 그 답은 시를 읽어나가면서 찾게 될 겁니다. "나에게 왔던 사람들,/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모두 떠났다"는 부분 또한 1994년과 1998년 모두 동일하게 제시됩니다. 1998년에는 "완전히 망가지면서/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이 사랑의 "징표"로 제시되는 부분에서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요. 어쨌든 확실한 것은 내가 사랑한, 사랑했던 사람들은 모두 "부서진 채" 떠났다는 것입니다.


어째서일까요? 다음 연에서부터 제시되는 메마른 "사막" 때문입니다. 그 사막은 무엇인가요? "내 가슴속"에 있는 것, "내 꿈틀거리는 사막", 즉 "나"입니다. 사막도 사막 나름일 겁니다. 흰 오아시스에 비밀을 감추고 있는 사막일 수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사막은 제자리에 있지 않는,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말라 가는 죽은 짐승"을 둔 사막입니다.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사막의 핵심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요?


사막의 열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고열의 에고"이며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신상神像이 벌거게 달아올라 신음"하기에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버립니다. 에고는 자기 자신을 뜻하는 라틴어 ego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즉 나 자신, 나에 대한 고집, 자기중심은 신상神像으로까지 확대되면서 '나'가 아닌 '타인'은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몇 군데는 부서진 채/모두 떠"나는 폐허가 완성됩니다.


시의 내용은 거진 고해에 가까워집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를 통해 우리는 "나"의 비극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느라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없다는 것. 이는 진짜 사랑을 해보지 못했다는 관계 차원에서의 아쉬움에 그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위한다는 행위가 결국 자기애로 귀결되어 버린다는 것에서 진정한 비극이 시작됩니다.


"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나를 위한 헌산, 나를 위한 자기 희생, 자의 자기 부정",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자유, 권리, 참여, 희생 같은 것은 개인의 이익보다는 더 큰 것, 타인과 사회, 세계를 위한 숭고함을 지닙니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황지우는 시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조차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고요. 헌신했던 대의의 가치는 자기애로 인해 퇴색됩니다.


활활 타오르는 에고, 나 자신에, 나 자신을, 나 자신만을 위한 행위는 결국 고립된 사막을 낳을 뿐입니다. 1994년과 1998년의 시 모두 타인은커녕 생명 한 줌조차도 남지 않은 황폐한 자아의 사막으로 마무리됩니다. 다만 1998년 시는 보다 직접적으로 끝나죠.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그 누구도 나를 믿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완전한 고립, 완전한 기대 없음. 화자는 덩그러니 남겨집니다. 자기뿐인 지옥, 그 원인이 너무도 분명한 지옥, 그러나 달라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 지옥.


자신을 위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느냐, 결국 좋은 일도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우리가 가장 중요합니다. 생물로서도 그렇고,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나뿐인 것, 나만 중요한 것, 나만 중심으로 돌아가는 동일성이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생존의 차원에서도, 이익의 차원에서도 말이죠.


자연 상태에서도 단일한 유전자는 변화에 취약합니다. 보다 잘, 오래 살아남기 위해 생물은 각종 환경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다른 종들과 함께 섞이고 살아왔습니다. 사상은요? 단일한 사상은 살아남기가 어렵습니다. 학문뿐 아니라 종교도 주변의 여러 믿음의 형태를 취합하여 오랫동안 살아남았습니다. 개인은 말할 것도 없지요. 나만이 옳고 내가 가장 중요하다는 아집은 사회적 동물로서도 취약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감정과 관계를 교류하고 지속하지 못하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뼈아픈 후회」는 들끓는 자기애가 어떤 비극으로 귀결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은 결국 가치와 의미의 한계에 부딪히게 마련이니까요. 여기서는 '사랑'을 개인적 관계에서만 쓸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차원에서 다루어 봅시다. 사랑이란 '나'에서 벗어날 수 있는 행위입니다.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역사』에서 사랑이란 '나'에게 있어 돌아갈 수 없는 대격변이자 상처를 주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저는 이것을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사랑이란 개인과 관계되는 돌연적인 혁명이다. 다시 말하면 지나고 난 후에야 이야기할 수 있는 돌이킬 수 없는 대격변이다. 일을 당하고 있을 때에는 표현이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랑에 대해서, 그 거대한 사랑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생기가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사랑이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사랑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지난 일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상처로부터 가능한 것이다. 사랑에 빠진 대아의 엄청난 팽창, (…) 이 사랑에 빠진 대아가 엄청나게 확대되는 반면, 그 사랑의 체험 한복판에는 이상한 구멍이 생긴다. 나르시스의 상처일까? 한 부분을 잘라낸다는 증거일까? 자기 속에서의 죽음인가? (…) 그것은 사랑에 있어서 <나je>란 타자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표현은 시나 정신착란이 우리를 환각으로 인도하며, 개체는 계속 분리되고, 타자 속에서 타자를 위해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을 인정하는 불안한 상태를 암시한다. 사랑과 함께 할 때 비극적인 위험도 감수하고 극복해야만 지고의 안전도 기할 수 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사랑의 역사』, 14-15쪽.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 살면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자신을 형성합니다. 그러나 굳건히 박힌 이 경험은 우리를 '나 자신'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사랑은 타인을 받아들이고 타인의 관점을 이해하고 이를 통해 단단한 나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고, 나 자신을 바꾼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닙니다. 달리 말하자면 이 단단한 '나'를 바꾸는 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특별한 사건이나 계기, 의식적 각성이 일어나지 않은 때에도 사랑을 행하는 것이다. 극히 이례적인 세계 균열의 경험에서(만) 촉발된 것이 아닌 사랑, 지루해 보이는 일상의 활동들, 반복들 또는 재발명 속에 드러나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것이 '사랑에 빠지는 것'의 진정한 의미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위험을 무릅쓰는 것. 이 숙명적인 만남으로 인해 일상의 좌표가 변경되리라는 점을 알면서도, 오히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만남을 갈구하는 것.

스레츠코 호르바트, 『사랑의 급진성』, 16;18쪽.


호르바트는 일상, 당연하게 생각한 것, 굳은 것을 균열을 가하는 사랑의 급진성을 혁명과 연결짓습니다. 일상이 바뀌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요? 일상적이지 않은 것이 침투해야만 합니다. 관계에서는 타자가 되겠죠. 이를 통해 내가 변화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나 자신이었던 것을 깨뜨리기 위하여 이를 지속하는 것이 사랑이 될 것입니다. 내가 아닌 것, 내가 몰랐던 것, 나를 바꾸는 것, 이 '다름'을 '나'로 동일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다름'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과 사랑의 차이를 정말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지만 중요한 세부 사항이 추가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독립성 요구는 사랑에 빠지는 행위에서 나타나는 특징이지만, 사랑은 그와 완전히 상반된다. 죽은 별처럼 다른 사람 주위를 돌면서 흡수하는 것은 급진적이지 않다. 그것은 마이클 하트가 말한 '동일자의 사랑love for the same'으로서, 차이를 지움으로써 통합하는 것이며 자기애적 형태의 사랑이다.

위의 책, 155쪽.


자신과 다른 것을 배척하는 동일자의 사랑은 자기애의 한 형태일 뿐입니다.「뼈아픈 후회」는 이를 잘 보여 주지요. 언제 또 올 지 모르는 세상, 언제 또 만날 지 모르는 타인과의 관계를 외면하고 만 "나"에게 사랑은 영영 미완이자 미지로 남습니다. 아집으로 둘러싸인 "나"의 사막은 나르키소스의 연못처럼 자신 외의 누군가를 허락하지 않으며, 사막은 마침내 나 자신조차도 잡아먹어 버릴 겁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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