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서 미래를 바라보기: 박인환, 목마와 숙녀

불탄 잔디의 싹이 더욱 푸를지도요

by 난란

이번에 다룰 작품도 매거진 <아직의 시의 영토>에서 언급했던 작품입니다. 공부할 때 선생님께서 인문학이란 짧은 것도 길게 쓰고 긴 것도 짧게 쓰는 것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 어렴풋이 알 것도 같습니다. 핵심을 잡아내어 짧게 쓰고, 부연하고 확장하여 길게 쓸 줄 알아야 한다는 뜻 아니셨을까요?



오늘 읽을 작품은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입니다. 농담으로 한국문학사의 미남 작가가 누구인지를 물으면 조선의 루돌프 발렌티노 임화, 순수한 영혼 윤동주, 모던보이 백석이 대표적으로 꼽히곤 합니다.( 간혹 이상이 등장할 때도 있는데, 이상에 대한 깊은 사랑이 느껴지는 한 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알아볼 박인환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겁니다. 박인환은 '명동 백작'으로 불렸던 멋쟁이였거든요.


박인환은 1926년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1958년에 사망했습니다. 고작 서른 살에 유명을 달리해서 더욱 안타까운 시인이기도 합니다. 박인환은 1944년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광복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게 됩니다. 이후 서울에서 마리서사라는 이름의 서점을 경영하기 시작하지요. 군산의 유명한 독립서점 마리서사도 박인환의 마리서사에서 따왔습니다. 서구 예술 및 문학 서적을 비치한 마리서사를 경영하면서 김광균, 김수영, 오장환 등 여러 시인들과 친교를 맺기도 했지요.


1946년 국제신보에 「거리」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 활동을 시작한 박인환은 1948년에 김병욱과 김경린 등과 함께 『신시론新詩論』을 발간했고, 1949년에는 김수영, 김경린, 양병식 등과 함께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 중에 부산에서 김규동, 이봉래 등과 함께 '후반기' 동인을 결성하여 모더니즘 운동을 펼치면서 시를 발표했는데, 오늘 읽을 「목마와 숙녀」도 이 시기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박인환은 1955년 첫 시집인 『박인환선시집』을 낸 후 이듬해인 1956년 심장마비로 사망합니다. 이상의 죽음에 대해 「죽은 아폴론」이라는 시를 썼던 그가 슬픔으로 인한 과음으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고요.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 쓰인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짧지만 긴 시를 남긴 박인환의 삶을 톺아보았다면 이제 그의 시를 읽어 봅시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미를 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 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환, 목마와 숙녀


제법 분량이 있지요? 찬찬히 읽어 봅시다. 이 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버지니아 울프"입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먼저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서 알아야겠지요. 영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버지니아 울프는 1882년에 태어나 1942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명한 문학평론가 레슬리 스티븐의 딸로 태어나 지적인 분위기에서 자랐으나 어머니의 죽음으로 정신질환 증세를 보였고, 의붓오빠의 성추행으로 성과 남성, 자신의 몸에 대한 병적 수치심과 혐오감을 지니게 되었죠. 정규 교육을 받지는 못했으나 독학으로 쌓은 지식으로 영국의 예술가, 지식인 집단 블룸즈버리 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손 가는 대로, 무의식적으로, 계산하지 않고 쓰는 것을 우리는 흔히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고 이야기하곤 하죠. 버지니아 울프가 바로 이 의식의 흐름 소설 기법의 개척자입니다. 「등대로」, 「출항」, 「자기만의 방」, 「댈러웨이 부인」 등 여러 글을 집필한 버지니아는 1941년 정신질환을 비관하여 코트 주머니에 돌을 넣고 강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극적인 삶으로 유명한 버지니아는 한편으로는 사회와 현실 참여를 뜻하는 앙가주망engagement과 반전反戰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자, 버지니아에 대해 생각하며 다시 시로 돌아가 봅시다.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연결되는 것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 "내가 알던 소녀",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입니다. "소녀"가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는 생애가 흘러가며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꽃피는bloom 정원의 초목 곁에서 자라난 소녀는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사랑을 이야기하는 숙녀로 자라나 끝내 목마를 타고 떠납니다. 떠나버린 사람의 생을 회고하는 것은 남은 사람의 몫이 됩니다.


술을 마시며 버지니아에 대해 이야기하던 화자는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갔다고 말합니다. 고립을 피했는데 어째서 시들어가는 것일까요? 인간이란 고립보다는 한데 뭉쳐 있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동물 아닌가요? 그렇다면 화자가 언급하는 고립이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다수의 의견이 꼭 옳은 것은 아닙니다. 버지니아가 반대했던 세계대전도 이 시가 작성되었을 무렵의 한국전쟁도 모두 다수의견으로 진행되었으니까요.


화자는 이어 고립을 피함으로써 시들었던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술병이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 버지니아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고 다시 말합니다. 다음 행에서 제시되는 "…등대에…/불이 보이지 않아도"라는 언급은 길을 비추는 등대의 부재, 방향과 희망 없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면서 울프의 「등대로」를 간접적으로 드러냅니다.


방향조차 알 수 없는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화자는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끝내는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고 단언합니다.


희망도 목적지도 남은 것도 없는 상태에서 끝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버지니아의 눈을 바라보는 것, 페시미즘의 미래를 지키는 것, 버지니아의 목마 소리를 기억하는 것, 버지니아의 이야기를 듣는 것, 눈을 뜨고 술을 마시는 것입니다. 술을 마시는 것은 버지니아를 기억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눈을 돌리지 않고 감지 않고 눈을 떠 버지니아의 눈을 바라보는 것은 허물을 벗고 다시 태어나는 뱀,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은 것이 됩니다. 청춘이란 무엇인가요? 적어도 이 시에서는 고립을 선택하여 오히려 시들지 않는 것, 회피하지 않는 것, 슬퍼하는 것이 곧 청춘입니다.


화자는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그저 잡자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떠나는 것인지 탄식합니다. 목마의 방울과 술병을 스치는 바람 소리는 화자 안에서 또렷하게 철렁이고 우는데 말이지요. 이 깊은 슬픔과 탄식, 우리는 이 시에서 무엇을 더 알아볼 수 있을까요?


「목마와 숙녀」는 1950년대 모더니즘 시의 대표작입니다. 그렇다면 명동백작 박인환이 추구한 모더니즘이란 무엇인지 한번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더니즘은 19세기 말부터 유럽에서 발생한 사조로, 20세기에 들어서 크게 유행합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사상으로는 니체의 허무주의, 마르크스의 유물사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있습니다.


모더니즘은 기존의 사회질서, 종교, 도덕 전통을 뒷받침하던 확실성에 대한 회의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기존 질서가 흔들렸을까요? 그 이유는 세계대전에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을 필두로 진행된 근대화가 결국 서로를 죽이고 죽이는 야만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은 당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지요. 박인환의 삶도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으로 나타나는 세계의 붕괴 사이에서 진행되었다는 점도 다시 한번 생각해볼 법 합니다.


한국의 경우 1920년대에 수입되어 주관성을 지양하고 일상적 사물을 관찰하여 견고한 이미지를 사용하는 사물시와 감정보다 지성과 의지를 중시하는 주지주의가 동시에 수용되었고, 1949년 전후로 모더니즘 운동이 다시 활발해집니다. 박인환의 경우 도시 감각과 현대 문명 의식에 집중하였습니다. 그가 서구 예술과 사조,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마리서사를 운영한 것과 명동백작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 것도 모던보이로서의 면모를 잘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시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목마와 숙녀」의 화자는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회피하지 않고 슬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페시미즘이란 무엇일까요? 페시미즘은 최악이라는 뜻의 pessimum에서 비롯된 말로, 염세주의로 번역됩니다. 반의어로는 낙관주의가 있지요. 염세주의는 신을 상실한 허무주의와 연결되며, 세상은 악이 지배하고 사람은 이를 없앨 수 없다는 관점에 기반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니체의 허무주의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신은 죽었다'는 말로 유명한 철학자죠. 그의 말은 기존 질서의 붕괴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니체의 허무주의는 단지 희망 없음을 뜻하는 소극적 자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질서와 체계를 해체하는 방법론으로서의 양가성을 지닙니다. 집을 무너뜨려야 새로운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니체는 염세주의를 두 부류로 나눕니다. 하나는 약자의 낭만적 염세주의로, 쇼펜하우어나 도스토예프스키, 바그너 같은 예술가들에 이에 해당한다고 보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강자의 고전적 염세주의로, 인간의 능동적 힘을 재인식하고 삶의 문제를 기존의 도덕 질서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도덕으로서의 비도덕주의자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태도로 구분하였죠.


그리고 허무주의의 극복도 두 가지로 나눕니다. 하나는 불완전한 허무주의, 다른 하나는 완전한 허무주의로 말이죠. 완전한 허무주의는 그가 강조했던 위버멘쉬, 초인의 달성이며 불완전한 허무주의는 그 이전의 병리적 중간 단계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허무주의가 완전히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불완전한 허무주의는 허무에의 완전한 침잠과 더불어 극복이라는 두 가지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완전한 허무주의는 절대적인 외부의 권위가 무너진 후에도 끊임없이 외부적 권위를 갈구하고 이에 기대려는 수동적 허무주의와 허무주의와 대면함으로써 허무주의의 원인을 자신의 정신력이 성장한 결과로 여김으로써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태도로서의 능동적 허무주의로 나뉩니다. 능동적 허무주의는 아직 자신만의 가치를 설정할 만큼 강한 정신을 지니지는 못한 상태지만 새로운 가치 체계를 구축하는 의지의 바탕이 됩니다.


허무주의는 기존의 가치 체계가 무너진 곳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한국전쟁을 겪은 박인환의 시는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부상과 몰락 가운데서 작성되었습니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한 후 1948년 새로운 시를 써보자는 희망으로 작성한 신시론과 1949년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라는 제목을 붙인 시집을 펴냈지만 한국전쟁이 터지죠. 그렇다면 시대의 격류에 정신없이 휘몰리며 우울의 정조를 노래한 박인환의 시는 허무주의의 무력감과 부정성을 그려내고만 있는 것일까요?


시로 돌아가 봅시다. 이 시는 버지니아를 떠올리며 슬픔의 잔을 기울이는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버지니아의 생애를 이야기하고, 상심한 별은 떨어지고, 문학도 죽고 인생도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리고,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좌절과 슬픔이 지속되는 와중, 화자는 이 슬픔에 그대로 가라앉지는 않습니다. '해야 한다'라는 어미가 반복되며 슬픔 가운데서도 "작별하여야 한다", "바라다보아야 한다", "기억하여야 한다", "들어야 한다", "마셔야 한다"라는 의지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후 철렁이는 방울 소리와 목메어 우는 술병 소리에 가슴이 미어지더라도 말이죠.


버지니아를 기억하는 것은 분명 슬픈 것입니다. 버지니아를 생각하는 것이 슬픈 이유는 버지니아가 깊은 슬픔과 우울, 그리고 무엇보다 현실에 몸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버지니아가 세계대전을 직면했듯, 박인환은 식민지기와 한국전쟁을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버지니아의 죽음이 그의 현실과 분리되지 않았다면 그를 생각하는 것 또한 필연적으로 현실에 대한 인식을 동반할 것입니다.


「목마와 숙녀」의 화자는 직면함으로써 발생하는 슬픔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고 몇 번이고 결심합니다. 작별하여야 한다, 눈을 바라보아야 한다, 기억하여야 한다, 들어야 한다, 마셔야 한다, 해야 한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다 보면 화자의 떨리는 손이 보이는 듯합니다. 그래도 술잔을 떨어트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슬픔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화자의 눈동자도 비치는 듯하고요.


발밑이 꺼지는 듯한 순간이 있습니다. 어떤 것을 생각해야 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지 모르겠는 막막한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비관과 염세, 우울이 덮쳐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시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때 어떻게 대처했나요? 혹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우리가 두려워하는 "한탄할 그 무엇"이란 무엇일까요? 「목마와 숙녀」의 붉어진 화자의 눈을 바라보면서 생각해 봅시다. 불탄 잔디의 싹이 더 푸른 법이니까요.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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