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 달콤한 고통이여: 오세영, 그릇 1·모순의 흙

우리는 결국 죽기 위하여 태어난 걸지도 모릅니다

by 난란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울까요? 불교에서는 진작부터 인간 세상을 괴로움이 끝없이 펼쳐진 고통의 바다, 고해苦海라 불렀습니다. 기쁨은 잠시뿐이고 새로운 고통이 밀려오거나, 기쁨의 형태조차 기억나지 않을 만큼 희미한 나날을 이어가기도 합니다. 불가해하고 불가항력적인 운명 앞에서 인간은 종교를 찾곤 합니다. 지친 몸과 마음을 기대거나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말이죠.


"시란 신이 없는 종교"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오세영은 시와 일반 종교를 비교하기 위하여 이런 말을 했는데요, 시와 종교 모두 이성, 즉 과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며, 종교는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에 의지하는 데 반해 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해결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절대자가 있는 종교를 통해서는 아마 두 가지 해결 방안이 나올 겁니다. 전능한 힘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아니면 이 고통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해 줄 수 있겠죠. 삶 이후의 보상을 제시하거나요.


그렇다면 절대자가 없는 종교, 신이 없는 시는 어떻게 이 고통스러운 삶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일단 인간에게는 전능한 힘이 없습니다. 문제를 뿅 하고 사라지게 할 수 없죠. 현상은 유지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 자신의 인식 뿐일 겁니다. 그렇다면 그 인식은 어떻게 바꿀 수 있죠? 시가 대체 무엇이길래 바꿀 수 있다는 말일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전에 이야기했던 시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상기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시란 일상 언어를 바꾸어 '낯설게' 함으로써 우리의 자동화된 인식, 굳어진 인식을 새롭게 만듭니다. 무엇을 통해서? 언어를 통해서지요. 사물을 인식하고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존재의 집인 언어가 바뀐다면 삶과 세계에 대한 인식도 바꿀 수 있을 겁니다. 이러한 맥락을 생각하며 오세영의 「그릇 1」, 「모순의 흙」을 읽어 봅시다.



시를 읽기 위해서는 먼저 작가에 대해 알아보아야겠지요. 오세영은 1942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대 국문과 학부 및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1968년 「잠 깨는 추상」으로 『현대문학』에 등단합니다. 충남대학교, 단국대학교, 버클리대학교, 서울대학교에서 강의하였고 종내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임명됩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기도 한 오세영은 시 창작과 평론을 병행하여 한국시인협회상, 녹원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공초문학상, 목월문학상, 만해시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오늘 읽어볼 시 중 하나인 「그릇 1」은 제1회 소월시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합니다. 자, 그러면 이제 시로 들어가 봅시다.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오세영, 그릇 1


자, 그릇이 깨지는 이미지를 단계적으로 상상하며 읽어 봅시다. 그릇이 깨지는 것은 어떠한 느낌을 주나요? 날카로운 파열음, 불길한 징조, 사고의 일환, 부상의 위험 등…… 이러나저러나 좋은 의미로는 떠오르지 않지요. 1연은 "깨진 그릇은/칼날이 된다"로 말문을 트고 있으니 말입니다. 무엇인가를 담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그릇이 "칼날"이 되어 버렸죠. 게다가 깨어짐의 원인이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빗나간 힘"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니 더욱 그러합니다. 절제와 균형, 얼핏 들어도 긍정적인 단어 아닙니까.


균형에서 벗어난 힘은 그릇을 깨트립니다. 깨진 그릇은 모를, 각을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눈을 뜨게" 하지요. 시퍼렇게 빛나는 칼날이 되어 버린 그릇은 차갑습니다. '모난 데 없던' 그릇은 "모를 세우고" "이성"을 획득합니다. 이 흉흉한 흐름에 비추어 볼 때 "이성"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겠지요.


자, 그릇은 깨졌습니다. 깨어져 칼날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할까요? 3연으로 넘어가 봅시다. "나"는 깨진 그릇, "사금파리"에 말을 겁니다. "지금 나는 맨발이다/베어지기를 기다리는/살이다" 라고요. 아니, 누가 이런 것을 원합니까? 베이는 것은 아프고 피도 날 텐데요. 하지만 "나"는 기꺼이 "사금파리"의 눈먼 사랑이 되어 줍니다. 베려는 날과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나. 그 이유는 다음 행에서 나옵니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


"나"는 "사금파리"를 받아들임으로써, 그것도 맨몸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상처입기를 자처합니다. "나"는 깨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깨진 그릇, 이제는 더 이상 그릇일 수 없는 "사금파리"를 껴안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로 인해 상처받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에 오히려 "성숙하는 혼"이라는 이름을 새로 붙입니다.


1연에서와 마찬가지로 4연은 "깨진 그릇은/칼날이 된다"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확장되죠. "무엇이나 깨진 것은/칼이 된다."라고요. '깨지다'는 여러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로는 "단단한 물건이 여러 조각이 나다", 둘째로는 "일 따위가 틀어져 성사가 안되다", 셋째로는 "얻어맞거나 부딪혀 상처가 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조각나거나 일이 틀어지거나 상처가 나거나. 어떤 것이든 이로 인한 것은 "깨진 것"이 됩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거나, 공들여 쌓아 온 일이 어그러졌다거나, 마음이 조각났다거나, 그럴 때에는 누구든 "칼"이 될 겁니다. 속에 독이 쌓여 안절부절못하게 되죠. 밖으로 칼을 휘두르지 않는다면 안으로, 스스로에게 칼을 휘두르게 됩니다. 서슬퍼런 이 날을 어찌할 줄 모를 때 누군가가 자신을 일러 "베어지기를 기다리는/살"이라고 한다면, 날 때문에 난 상처가 "성숙"하다고 말해준다면 어떨까요? 혹은 누군가의 날에 베여 고통스러울 때 우리에게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이라고 말해준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그릇의 관점에서도, "나"의 관점에서도 시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릇 1」과 함께 읽어볼 「모순의 흙」은 1985년 출간된 『모순의 흙』에 함께 수록된 시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각 작품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읽어 봅시다. 이 시는 저 시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저 시를 읽고 나면 이 시의 의미가 조금 더 명확해질까? 두 개를 연결하면 어떨까? 세 개는? 가능성을 펼치면서 읽다 보면 한 권의 의미를 나름대로 파악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면 「모순의 흙」을 읽어 보시죠.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그릇
언제인가 접시는
깨진다

생애의 영광을 잔치하는
순간에
바싹 깨지는 그릇
인간은 한 번
죽는다

물로 반죽하고 불에 그슬려서
비로소 살아 있는 흙
누구나 인간은 한 번쯤 물에 젖고 불에 탄다

하나의 접시가 되리라
깨어져서 완성되는
저 절대의 파멸이 있다면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모순의 그릇

오세영, 모순의 흙


여기서도 그릇이 등장합니다. 다만 이 시에서 다루는 그릇의 의미는 조금 더 확장됩니다. 그릇은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어떻게 흙으로 돌아가나요? "언제인가" 깨지면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2연에서는 그 "언제"가 조금 더 구체화됩니다. "생애의 영광을 잔치하는/순간에/바싹 깨지는/그릇"이라는 구절로 말이죠.


그릇의 목적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그릇은 무언가를 담기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무언가를 담으며 그릇은 이리저리 움직이고, 그로 인해 깨어집니다. 만약 장식장에 곱게 놓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깨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어떤 것도 담을 수 없겠죠. "생애의 영광"은커녕 물 한 모금도 담지 못할 테고, 쓰이지 않는 그릇은 그릇이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이 그릇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다음 행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이라고요.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만들어진 그릇, 생애의 영광을 잔치하는 순간에 깨지는 그릇, 그리고 한 번 죽는 인간. '흙으로 빚어진 인간'이라는 기독교적 상징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상징은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릇에 비유해서 말이지요.


그릇은 어떻게 만들어지나요? 흙을 골라 반죽하고 형태를 빚고 불에 넣어서 만듭니다. 이를 통해 흙에서 그릇으로 거듭나게 되지요. 이 시는 그릇을 만드는 과정을 생의 고난과 연결합니다. "누구나 인간은 한 번쯤 물에 젖고 불에 탄다" 라고요. 춥고 뜨겁고 고통스럽지만 이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과정으로 다루고 있지요.


그리고 다음 연에서 선언합니다. "하나의 접시가 되리라"고요. 그리고 그 전제는 "깨어져서 완성되는/저 절대의 파멸"입니다. 물세례도 불세례도 감당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는 "생애의 영광"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깨어짐으로써 비로소 목적과 의미를 달성하는, "흙이 되기 위하여/흙으로 빚어진/모순의 그릇"이라는 생의 모순에서 비롯되지요.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태어났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담보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기 위해서 태어날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생각한 해도 고통스러운 죽음이 삶의 필연적 결과라니 말이지요.


우리는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좇습니다. 누가 힘든 걸 좋아하고 편한 걸 싫어하나요? 아픈 것은 나쁜 것이고 아프지 않은 것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이 고통이라는 것은 정말이지 외면하고 싶은 사실 아닌가요? 그러나, 그렇지만, 우리도 사실은 압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부분이 분명 있고, 다치면서 깨닫는 것도 있다는 것을요. 쾌락과 고통 사이에 선을 그어 버리면 그 사실을 결코 알 수 없을 겁니다.


「모순의 흙」은 흙에서 그릇으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순환을 목적으로 삼는 태도를 제시합니다. 인간이란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그릇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젖고 타야 한다면, 누구나 그러하다면, 깨어지는 것이 생애의 영광을 담느라 그러한 것이었다면, 그러면 우리는 달리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고통을 두려워하고, 고난을 꺼리고, 죽음을 피하느라 급급해 알아채지 못했던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세영의 시와 함께 들을 노래, 혹은 시 하나를 추천합니다. 가수이자 시인인 레너드 코헨의 송가Anthem입니다. 시를 읽고, 글을 읽고, 여운이 가시기 전에 노래를 들어 보세요. "종을 힘껏 울리세요, 그대가 바라는 완벽함은 잊어버리고. 모든 것에는 금이 가 있어요. 빛은 그 곳으로 들어오죠." 라는 가사를 되새김질하면서, 너덜너덜한 삶을 감추지 말고 가만히 보아 주세요. 그 사이로 엮이는 빛의 무늬를 살펴보면서요.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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