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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Apr 17. 2024

생각을 멈추면 세계는 경직될지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매체나 장르에 관계없이 창작자의 철학, 혹은 창작론 읽는 것을 좋아한다. 어디에서 무슨 유명한 상을 받았고 몇 쇄를 거듭 찍었으며 관객을 얼마나 동원했고… 하는 것들도 한 작품의 훌륭함을 어느 정도 증빙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어떤 작품들을 짓고 또 지은 한 사람의 크리에이터가 작품을 통해 일관되게 하고 싶어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글을 읽는 것은 그의 작품을 조금 더 편안하고 깊게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 저자 고레에다 히로카즈 | 출판 바다출판사 | 발매 2017.11.27.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어떤 영화들은 압도적인 서사로 관객을 끌어들이지만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는 그보다는 조금 더 낮은 층에서 시선을 손짓해 부른다. 쪼그려 앉아서 보아야 보일 수 있는 것들.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여쁜 것들.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을 화면에 담아내는 그의 작품 세계를 무어라고 표현할 맞춤한 단어를 찾기가 정말 어렵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분명히 느껴지는 게 있는데, 어째서 그 감수성을 표현할 말은 이렇게 안 찾아지는지(니가 못써서 그래. 넵 ㅠ.ㅠ). 그런데 고레에다 감독이 본인의 작품에 대해 쭈욱 이야기하는 이 책을 읽다 보니 그의 작업 철학이라고 할지, 견지하려고 하는 철칙 등이 그의 스타일로 나타났음을 알겠다.


저는 전작에서 깨달은 ‘관계성을 그린다’라는 방법을 구성의 축으로 삼기로 하고, 이를 위해 1인칭 내레이션을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자신이 이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느꼈다는 것을 객관적인 정보로서가 아닌 개인적인 감회로서 작품 속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107쪽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면 전달방법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 되는 것일까. 한참을 머무르게 되는 문장이다.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싶은지’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만도 창작자로서는 가장 큰 허들을 넘은 셈이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다큐멘터리란 ‘다양한 해석 가운데 한 가지 해석을 자기 나름대로 제시하는 것’일 뿐이지 않을까요. 예전에 닛폰TV에서 <논픽션 극장>이라는 다큐멘터리 방송을 만든 우시야마 준이치 씨는 “기록은 누군가의 기록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라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는데, 정말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113쪽


과도하게 타인을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의의를 찾으려 하는 이들에게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이면 좋겠다. 좀더 많은 사람이 두려움없이 자신의 시선을 세상에 드러낼 용기를 갖기를, 그래서 많은 해석과 풍부한 이해의 스펙트럼이 펼쳐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를 공상한다. 상대의 가치관을 통해 나의 생각을, 입장을 뾰족하게 가다듬을 수 있지 않나. 누군가를 찌를 말 대신 나를 벼리는 것. 


배우에게서 자발적, 내발적으로 생겨나는 감정을 이용하여 영화를 한 편 찍으면 재미있겠다, 그렇게 생각한 저는 차기작 <디스턴스>에서 배우를 쓰긴 하되 각본 없이 역할과 설정만으로 찍는, 일종의 실험적 스타일을 시도했습니다. -138쪽
이 영화에서 그리고 싶었던 건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든가, 어른은 아이를 이렇게 대해야 한다든가, 아이를 둘러싼 법률을 이렇게 바꾸어야 한다는 등의 비판이나 교훈이나 제언이 아닙니다. 정말로 거기서 사는 듯이 아이들의 일상을 그리는 것. 그리고 그 풍경을 아이들 곁에서 가만히 바라보는 것. 그들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이를 통해 그들의 말을 독백이 아닌 대화로 만드는 것. 그들 눈에 우리의 모습이 투영되어 보이는 것. 제가 원했던 건 이러했습니다. -190쪽 
거울을 보는 여자아이의 경우는 “이 장면에서는 뭘 생각하고 있나요?”라는 질문을 받아서 “이 어머니는 소중한 딸과 떨어져서 사는 거야”라며 자신의 미래와 겹쳐 보도록 했습니다. 단, 감정은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378쪽


대략 이와 같이 그가 찍어온 작품들에서 깨달은 점이라든가, 시도했던 방법론들. 그로 인해 얻은 효과나 아쉬웠던 점 등만 분석한 것이 아니다. 함께 작업했던 스탭들이나 배우들과 나누었던 많은 대화와 상호작용의 일화들이 심심찮게 실려있는데 건강한 비판과 피드백 문화의 모범과도 같다. 이 책을 통해 현재의 고레에다 감독이 되기까지 그가 만나고 함께 일해왔던 많은 동종업계 종사자들이 그에게 끼친 영향만큼 그 자신이 또한 함께 일했던 이들에게 미친 영향력이 작지 않을 것이다. 멋진 작품을 만드는 동안 여러 후배들에게 알게모르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을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문단을 인용한다.


만약 저의 세계관 안에서만 영화를 계속 만들어 나가면, 영화가 점점 축소 재생산되어 ‘어쩌고 월드’라고 불리는 세계 속에 갇힐 것 같습니다. 그보다 별로 접점이 없는 사람이나 사물 등과 만나서 만들어 나가는 편이 저 자신도 재미있을뿐더러 새로운 발견도 있습니다. (...) 물론 감독의 이름으로 이야기되는 작품을 찍고 싶긴 하지만, 적어도 50대 동안에는 의식적으로 바깥쪽을 향해 세계를 넓혀 나가고 싶습니다. -4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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