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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Apr 20. 2024

내게 재미를 묻는다면

김민섭 外, 내가 너의 첫문장이었을 때

원본_2020-08-31 12:20


https://blog.aladin.co.kr/sweetpip/11960914 



내가 너의 첫문장이었을 때 | 저자 김민섭,김혼비,남궁인,문보영,오은 | 출판 웅진지식하우스 | 발매 2020.07.01.


        

이 책이 재미있었습니다(단호하다).



꽤 오래 생각해 봤는데도, 재미있다는 말처럼 넓고 쉽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아요. 그만큼 닳고 낡은 말이지요. 재미 포인트를 1점 획득하셨습니다, 라고 머리 위에 캡션이 딱 떠오른다고 쳐도 말이죠... 독서가 무슨 아케이드 게임도 아니고 그런 게 정해져 있을 리가요. 그러니까 그냥 재미있었다고 퉁치고 넘어가지 말고 어디가 재미있었는지를 밝혀 쓴다면 이게 나하고도 재미 케미가 맞을지 안 맞을지 좀 더 쉽게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런 차원에서, 나는 어디가 재미있었을까.



딱 한 마디로 줄여 쓴다면 김혼비 작가를 발견한 책이어서 재미있었습니다. 컨셉과 주제가 명확한 기획물을 읽을 때의 제일 큰 수확은 새로운 작가를 건졌을 때... 라고 생각하거든요. 이 책에 실린 김혼비 작가의 모든 글이 다 어떤 식으로든 깊은 인상이라는 마크를 남겼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백미는 뿌팟퐁커릴y한 K 씨에 대해(물론 그 계기를 열어준 태국인 친구 V 씨의 역할이 미미하다고 할 수 없지만) 쓴 글이거든요. 이 글이 백미인 이유는 바로 이 주제를 선정한 작가가 본업도 따로 계신 그 유명한 남궁 작가이기 때문이죠.  이것은 나를 이길 자가 없을 것이다 회심의 미소를 흘리며 낢궁캭뿌팟퐁(ㅈㄱ... 이걸 쓰는데 오타를 네 번 냈...) 이야기를 쓰셨겠지만, 혼비 작가의 뿌팟퐁커릴y 이야기에 카운트 어택을 맞고 가슴을 부여쥔 채 장렬히 쓰러졌을 것이다, 라고 상상 속에서 확신하는 바입니다. 원정 경기에서 승리했을 때가 원래 더 짜릿한 법 아니겠습니까.


쩔쩔맸던 이유는 막상 이 모든 이야기를 일본어로 말하려고 하니 시작부터 막혀서였다. 기약? 관계? 기약할 수 없는 관계? 일본어로 대체 뭐지?
그런 언어의 장벽에 부딪혔을 때 내가 자주 쓰는 또 다른 방식은 쉬운 단어를 조합해서 어떤 예시를 만들어 낸 후 거기에 빗대서 설명하는 것이었다. 딱히 비유법을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비유가 잘 전달될까 불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있잖아. 나는 요즘 전자레인지가 없어서 되게 불편해. 물론 이제라도 사면 되지만 나는 석달 후면 일본에 없는데 그 석 달 행복하자고 어차피 버리고 갈 비싸고 커다란 물건을 만들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너는 전자레인지 같은 거야. 함께하면 석 달 동안 무척 행복하겠지만 결국 남겨 두고 가야 하는데. 그건 너무 힘든 일이 될 거야." -171쪽


두 번째 재미 포인트.


더할 나위 없이 참신한데 거칠고 날카로워서 듣는 사람은 물론 말하는 사람의 고막마저 상처내는 그런 마이너스 이펙트가 없는, 의뭉스럽고 귀여운 맛도 있지만 나는 지금 너를 까고 있는 거지롱! 의 핵심이 살아있는 욕을 배울 수 있습니다. K 작가님께 감사의 꽃다발이라도 바치고 싶은 심정. 요즘 내 속을 썩이다 못해 발효해서 새 미생물이라도 키워보고 싶으신 건가, 본인의 전공과 아무 관계 없는 학계에 이름을 드높이고 싶은 엉뚱한 야망이라도 갑자기 불태우고 있는 건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어떤 분이 계신데(this is the person who must not be named), 이 분이 바로 그 말갈족 같아서였다는 걸... 깨우친 순간 어떤 환희가 찾아오더군요. -_- ... 이 상쾌하고, 불쾌감은 전혀 주지 않는 드립을 칠 때마다 말초신경계를 후드득 훑고 지나가는... 어떤 쾌청한 감각이 있습니다. 그렇다고요. ㅎㅎㅎ



이상을 종합해 본 결과 뭔가를 새로 얻었을 때 재미있었다고 할 만 하다는 결론을 하나 얻을 수가 있었네요. 물론 재미의 세계는 광활하기 짝이 없어 이런 잣대 하나만 찍어놓고 탐험을 마쳤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겠습니다만, 그래도 그게 뭔지 알아내려면 하나씩 파 보는 게 제일이죠. 사실 제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중딩이가 심각하게 재미가 뭘까? 라고 화두를 던지기에 생각하느라 끼적대 봤습니다만...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한 구절.


그러는 동안 나의 삶이 조금씩 바뀌었다. 나는 여전히 평범한 고등학생이었지만, 이전과는 조금씩 다른 몸이 되어 갔다. 쓰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언어를 가진 사람이 된다는 말과도 같다. 그러면 그 누구도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타인의 세계 안에서 타인의 언어로 자신이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은, 모두에게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두려움을 준다.
(...)
나 역시 나의 몸에 새겨진 글을 언제든 나의 언어로 옮겨 적을 수 있고 지금을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 그때부터 나는 언젠간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작가라기보다는 계속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존중받는 개인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49쪽
어쩌면 나는 지금도 알 수 없는 어느 미래를 향해 가고 있다.
그곳은 막연한 행복, 아직 그 형태를 알 수 없는 기쁨,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사랑 같은 것들이 내 삶에 녹아있는 어떤 양지바른 곳이 될 거라고 나는 믿고 있을 것이다. 그 신기루처럼 빛나는 어느 애매모호한 곳을 향하여, 내가 하루하루를 차곡차곡 쌓아 넣고 있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그것이 단지 곁에 있는사람에 대한 다정함이든, 오늘을 보다 더 기억하고 돌보고자 썼던 글 한 편이든, 더 삶을 사랑하고자 찾아 들었던 음악 한 곡이든, 나는 어느 토끼굴 속으로 조금씩 삶의 조각들을 굴려 넣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 삶에 대한 성실함이란, 그렇게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3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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