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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Apr 24. 2024

나도 몰랐던 나의 마음은

배예람, 좀비즈 어웨이

3주 전에 장염과 독감으로 지독하게 앓은 뒤 몸이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었다. 주말 동안 새로 나타난 증상은 명확하게 목감기지만, 몸이 이 지경이 된 데는 심리적인 이유가 컸다. 그렇게 목소리가 안 나오는 와중에도 마감을 치고 발등불을 껐다. 끄고 보니 이미 새카맣게 타서 더 탈 것도 없더라마는.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미팅을 하고 또 돌아서선 집안일을 하고.      


나를 울리는 것도 글, 웃기는 것도 글. 


한 줄 한 줄 곱씹어 읽어야 하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가득한 책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도저히 여백을 해석하며 읽을 여력이 안 날 때는 그냥 신나는 글을 읽어야 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이 복잡했기에 (아마도 내 머릿속 편도체는 여러 번 폭발했다가 재생하기를 거듭하지 않았을까) 진짜로 머리가, 사람의 신체가 찢기고 터져나가는 책을 읽기로 했다. 그렇다고 내가 슬래셔 장르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런 외피를 두른 서사를 읽다 보면, 압도적인 공포가 지배하는 소설을 읽다 보면 날뛰던 감정이 순식간에 갈무리되는 사람도 세상엔 있는 법이어서. 그래서 잔인한 이야기와 신나는 것에 대체 무슨 접점이 있냐면, 대충 넘어갑시다.     

뭐 그렇다고 이게 엄청나게 공포스러운 소설은 아니다.      

「좀비즈 어웨이」, 안전가옥에서 나온 배예람 작가의 소설이다. 어쩐지 요새 좀비를 소재로 잡은 작품을 많이 읽은 것 같은데… 우연이겠지. 우연이다.      



좀비즈 어웨이 | 저자 배예람 | 출판 안전가옥 | 발매 2022.03.31.



<피구왕 재인>, <좀비즈 어웨이>, <참살이404>라는 제목으로 세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이야기일까 싶은데 놀랍게도 이 작품들은 느슨하게 엮이어 있고 끝까지 다 읽고 나면 아, 하고 한숨을 뱉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썼을까. 길지도 않은 이 이야기 속에서 이렇게 선명하게 빛나는 마음이라니. <피구왕 재인>에서 겁이 많은 화자는 피구 경기 중에 매섭게 날아온 공을 처음으로 꼭 붙잡고, 어찌할 수 없이 뿌듯한 마음에 같은 반 친구들을 보며 웃지만 돌아오는 것은 비명소리다. 재인이 붙잡은 공은, 공이 아니라 함께 경기하던 3반 부반장의 뜯겨나간 머리다. 


재인은 느닷없이 창궐한 좀비 떼들 사이에서 혜나를 찾아 헤매면서 혜나와의 첫 만남을, 함께 보낸 시간들을 되짚는다. 독자는 재인과 같이 숨이 턱에 닿도록 뛰면서 재인의 기억 속을 함께 두리번거린다. 그렇구나, 재인에게 혜나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재인은 자신이 왜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조차 혜나를 찾아 헤매는 것을 끝끝내 포기하지 못하는지 모르지만, 홀로 좀비 떼와 사투를 벌이는 혜나를 찾아낸 순간 답은 행동이 되어 마침내 재인을 지금껏 해보지 않았던 어떤 일을 하게 만든다. 구차한 설명이 없어도, 그저 마지막 문장,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혜나를 위해(…) -50쪽      


에 이르면 잠시 입을 다물 수밖에.      


두 번째 이야기도 겉보기만큼은 기이하기 짝이 없다. 좀비 아포칼립스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연정은 좀비의 인육을 거래하는 정육점에서 일한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인간성이 남아있지만 머리만 남은(또 머리네…) 성하가 부모님을 만나게 도와달라는 부탁을 수락하며 함께 길을 떠나는 일종의 로드무비다. 아니, 로드무비에 가깝다. 

여정 중에 연정에게 일어난 변화가 물론 중요하지만, 목적지에 이르러 원했던 바를 성취하는 데 실패했다고 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여행의 끝에서 마침내 성하는 자신이 숨겨왔던 비밀(이라고는 하지만 대반전급은 아니고)을 밝히며 사과하지만, 연정은 화내지 않는다. 성하에게 속은 것인데, 왜 연정은 화내지 않았을까?     

 

내 발걸음은 성하의 예상보다 훨씬 느려서 우리는 당초의 예정보다 더 오랜 시간을 같이 있어야 했다. 어떤 날은 편의점에서, 어떤 날은 할 수 없이 벤치 위에서 잠을 청했다. 성하는 매번 내 머리맡에서 망을 보며 잘 자라고 인사를 했다. 내일 봐. 그 말을 들으면 신기하게도 잠이 쏟아졌다. -104쪽     


잘 쓴 소설의 최고 장점은, 살면서 여간해서는 겪을 일 없는 정서적 극한지대에 독자의 마음을 주인공과 함께 처넣고(이보다 적절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함께 구르며 느껴보게끔 만드는 것이라고 믿는 1인으로서 성하와 연정이 마지막에 함께 이루는 어떤 일을 묘사한 문단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다.      


나는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성하가 나만큼이나 두려워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남들을 지루하게 한다. 말주변이 없고 위로에는 더 서툴다. 뭐가 더 나은 건진 상관없어. 나는 짧게 덧붙였다. 괜찮아. 나는 언젠가 성하가 내게 했던 말을 똑같이 따라 했다. 느리고 약해도, 겁이 많고 비겁해도 괜찮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오랜만에 복습이라는 걸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새로운 마법의 문장을 읊는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성하의 팔이 내 어깨에 매달렸다. 나는 성하의 손을 토닥거렸다.
-109쪽      


성하와 연정이 오늘 밤에도 서로에게 내일 봐, 라고 인사하며 오늘을 접을 수 있기를.      


<참살이404>는… 쓰다 보면 중요한 스포일러가 나올 것만 같아서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세 단편이 모두 하나의 커다란 사건을 기점으로 유기적으로 얽혀 있고, 각각의 이야기가 완성도가 정말 좋았다. 여운도 많이 남고. 여운이 많이 남는 이야기를 읽고 나면,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아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이 좋음을 나 혼자 알고 있기엔 너무 아까워서. 이런 이야기를 써낸 작가가, 그만한 경제적 풍족함을 누렸으면 좋겠어서. 하지만 이야기에 돈을 쓰는 사람은 점점 적어지고, 그러니 어찌해. 나 같은 변방의 독자라도 계속 떠들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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