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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Jun 08. 2024

이별을 준비하며 맞으며 곱씹으며

알베르토 망겔, 서재를 떠나보내며

어쩌면 내가 붙인 제목은 지나친 궁상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이별이 나와 평생을 함께 했던 서재와의 이별이라면 그것은 배우자와의 사별과 무엇이 다를지. 아니, 어쩌면 조금 더 가슴 아픈 이별일지도 모르겠다. 정말이지 볼 꼴 못 볼 꼴 다 보여주고, 문자 그대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도 우울할 때도 늘 함께 했던 그들과의 '자발적' 헤어짐이라면. 그런 이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어쩌면 슬슬 생각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자각이 들었다. 아주 새삼스럽게. 내게는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가족 혹은 그 이상의 무엇이었는데, 누군가에게는 내가 치워야 할까 봐 부담스러운 쓰레기에 짐덩어리가 될 수도 있다는 슬픈 깨우침을 주는 책.



서재를 떠나보내며 | 저자 알베르토 망구엘 | 출판 더난출판사 | 발매 2018.07.30.


그러니 그런 영혼의 반쪽을 떠나보내며 부제 그대로 '비가' 하나쯤 지어 바치는 것도 당연하다. 하루 이틀의 시간을 가져간 책들이 잊혀지는 게 싫어서 토막글이나마 끼적대고 있는 입장에서, 나를 형성하는데 정신적인 유전자를 제공했으며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부모의 품처럼, 정서적인 둥지로써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실재적이며 동시에 가상적인 공간을 스스로 해체하는 아픔이 어떤 것인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진이 빠진다. 바라건대 그날이 하루라도 더디 오기를.


우리는 어떤 사람의 애독서 목록을 살펴봄으로써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으며 또 그 사람과 사귀고 싶은 마음이 드는지 여부도 미리 알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서재는 일종의 자서전이다. -8쪽


글쎄, 요즘은 애독서를 살펴보는 데까지 갈 것도 없이 책을 읽는지, 안 읽는지를 먼저 물어야 하는 세상인지라. 그나마도 읽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영혼의 벗을 만난 것처럼 반가워해야 할 정도인데 무슨 책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은 어쩐지 사치 같기도.


나는 서가에 수십 권의 형편없는 책들을 가지고 있으나, 형편없는 책의 구체적 사례를 제시해야 할 때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버리지 않는다. -17쪽


나는 이런 유머가 좋다. 정말 좋다. 이쯤에서 ㅋㅋㅋㅋㅋㅋㅋㅋ를 한 번 남발해 줘야 맛이지...


우리가 어떤 사물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체험을 재창조하고 전달하는 언어의 힘을 믿는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동시에 언어는 그 체험을 완벽하게 전하지 못하는 단점을 갖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언어에 대한 믿음은 다른 모든 진정한 신앙과 마찬가지로 언어의 힘을 부정하는 일상 속 습관에 의해 약해지지 않는다. 우리가 아주 간단하고 분명하게 어떤 사물을 말할 때에도 우리의 생각과 발성을 통해 전달되는 것은 그것의 그림자일 뿐이다. -111쪽


알베르토 망겔은 분명히 존재했었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그의 서재를 현존하는 실체로 만들었던 책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보다 그 책들이 남긴 바로 그 흔적과 그림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니 이 문단이야말로 이 책을 뚜렷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복은 결국 정체의 위험을 알려주는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반복할 때마다 전에 읽었던 것 위에 무언가를 추가하게 된다. 모든 이야기는 말하기와 다시 말하기가 중층적으로 겹쳐 있는 팔림프세스트이다. -137쪽


내 경험에 비추어볼 때 열정적인 독자의 사례는 때로 성공을 거둔다. 책의 어떤 페이지를 읽고 감동을 받은 친구, 부모, 교사, 사서의 체험은 때로 다른 사람에게 즉각적인 모방까지는 아니더라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나는 그게 훌륭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독서 기술의 발견은 은밀하고 애매모호하고 비밀스럽고 거의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며, 이런 감상적인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지만 마치 사랑에 빠지는 것과 비슷하다. -223쪽


나는 어쩌면 바로 그 가장 내밀한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이 사랑했던 책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열광했던 것이야말로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투명하게 드러내 보이니까. 요즘처럼 나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는 일이 위험했던 시기가 존재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럼에도 누군가는 손을 내밀었고 또 내밀며 들리지 않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기요, 이 책 정말 좋아요. 혹시 한 번 읽어 보시겠어요?


ps. 나는 아직 '서재'를 떠나보낸 적은 없으나, 결국 책과 음반과의 겨루기에서 패배한 음반들을 싹 정리하며(여기엔 애플뮤직이 한몫했음을 밝힌다...) 이별했던 시기가 있었다. 어떤 음악들은 아주 취향을 타기 때문에 공감받기가 몹시 어렵지만, 아래의 음악은 '공감'은 받지 못할지언정 유소년, 혹은 청년기를 이 시기에 보낸 적이 있는 세대들이라면 분명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장담한다. 플러스, 이 곡의 선율은 알아도 곡명을 모르셨던 분이 많으시리라고도 생각한다. 들어보시기를.


https://www.youtube.com/watch?v=9LRsYn9ufY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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