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화 Jun 18. 2024

자기만의 답

3. 가능성을 닫지 마세요(7)

-괜찮으세요? 이야기 들으실 수 있겠어요?


의사 선생님이 왜 죄송하신데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그 사과의 말 뒤에 따라 나올 말이 무엇일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윤소은은 심장에 이어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윤소은 수강생님?”


윤소은은 순식간에 옛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옛일. 옛일이어야 했다.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다. 윤소은이 대답 대신 태블릿 화면에서 눈을 떼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화면 안의 이미지들에 감탄한 나머지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차라리 그게 낫다고 생각한 윤소은이 가만히 숨을 내뱉었다. 들숨이 제 차례를 찾아왔을 때, 깊이 묻어두었던 옛 기억이 반복해서 찾아오는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그저 열심히 살기만 했는데, 삶이 자신에게 얼마나 거친 돌부리를 마련해 두고 있었는지. 어찌 넘어가긴 하려는지, 아니면 주저앉아버리려는지,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지켜보기라도 하겠다는 것마냥. 그녀가 무심히 짐작했던 것보다도 훨씬 많은 사람이 걸린다는 암이라는데, 윤소은에게는 채인 순간 발가락 뼈부터 부서지는 듯한 통증을 안긴 돌부리였다. 


그깟 것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고 어떤 발버둥을 쳐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치료를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돈을 벌려면 걸레짝같이 힘없는 몸으로라도 일을 해야 했다. 그저 공정, 이라는 낱말에 이렇게 심신의 균형이 쉽게 흔들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못했던 윤소은은 다시 테이블 위로 시선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왜 하필 나한테? 누구에게도 해는커녕 아주 작은 폐조차도 끼치지 않으려 노력했던 삶이었다. 그것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삶이 누구에게나 공정치 않음을 새삼 깨달았는데, 자신은 무엇을 무기로 그 고비를 넘어야 할지는 여전히 암담했다. 어떤 태도가 과연 해일처럼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날벼락같은 병마의 습격에 대처할 수 있을지 여전히 그녀는 알 수 없었다. 혹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 그런 거대한 눈사태에 휩싸이고도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과연 누군들 알 수 있을까? 


세상만사가 대체로 미리 알고 대처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이었음에도 막상 자신이 부당하고 불공정한 일을 당한 처지에 놓였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인지를 미리 준비해 두고 있는 사람은 있을지, 그리고 그 소신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알고 싶었다. 윤소은은 자신의 눈앞에서 조곤조곤 이야기를 주고받는 이들을 바라보며 혹여 누군가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절대 꺼내놓을 수 없는 질문이었어도.


"와, 심각해진다. 무슨 시사토론하게 생겼네요." 


하릴없이 상념 속을 헤매던 윤소은이 누군가의 웃음기 가득한 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고쳤다. 윤소은이 어느 순간부터 대화에서 물러난 채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 딱히 중간에서 끼어드는 것도 어색한지라, 그녀는 가만히 오가는 말들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도 공정을 요구하려면, 스스로는 떳떳해야 할 것 같아요." 


김은지였다. 평소 그다지 말을 많이 하는 편도 아니었고, 이로미처럼 자기주장이 확실한 것도 아니었는데도 어떤 순간에는 또렷하게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곤 했다. 마치 원래가 그런 사람인데, 오랫동안 억눌려 있었던 것처럼. 윤소은은 가끔씩 어떤 생각을 분명하게 밝히는 김은지가 흥미로웠다. 마치 초등학교 시절에나 들을 수 있었던 교장 선생님의 훈화말씀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말에 묘하게 집중하게 되었다. 스스로의 삶으로 자신이 하는 말의 증거를 삼아온 사람인 것일까. 흥미가 일었다. 


"자기가 그런지 아닌지는 어떻게 아는데요?"


경험으로부터의 학습, 각자의 최선, 그리고...

윤소은은 속으로 떠오른 말을 소리 내어 보태지는 않았지만 허공에 떠오른 질문에 스스로의 답을 구해보았다. 이런 것도 썩 괜찮아 보였다. 자신이라면 결코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았을 질문을 만나 자기만의 답을 작성하는 일도. 직접 고른 색으로 도자기에 옷을 입히는 일도, 나름의 답을 만드는 연습의 일환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하면서. 

이전 27화 공평과 공정은 같은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