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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Jun 14. 2024

공평과 공정은 같은가

3. 가능성을 닫지 마세요(6)

최현욱이 이 자리에 없는 진태하를 조금 편들자 이로미가 눈꼬리를 축 내려뜨리며 울상을 지었다.


“저 사장님 흉본 거 아니에요, 선생님. 맨날 같이 먹는 사람이랑 먹는 것보다 새로운 식사친구가 있으면 기분이 새롭잖아요. 대화도 좀 다르구― 그런 얘기예요.”

“그럼요, 알죠.”

“근데 선생님, 진우 씨가 쓰는 건 무슨 색이에요? 차분한 게 엄청 예뻐요.”


이로미가 손을 들어 이진우가 마침 휘젓고 있던 물감을 가리켰다. 뭐라고 나무라는 말도 아닌데 이진우는 사뭇 당황하여 말까지 더듬었다.


“그, 그게요. 제가 맘대로 섞었는데… 딱 원하는 색이 없어서 이거하고 저거 두 개 조금씩 섞어봤는데… 근데 지금 이대로는 마음에 드는데 구워지면 또 어떤 색일지 알 수가 없어서… 좀 자신이 없어요.”           

    

최현욱이 붓 아래 고인 물감을 가만히 바라보다 미간을 모은 채 생각에 잠겼다. 역시, 이런 것도 경험치가 쌓여야만 노하우가 생기는 걸까. 분명 오늘 수업 시작 전에는 수강생 한 사람씩 도색을 도와줄 생각이었는데, 실제 수업이 흘러가는 방향은 그가 예상한 것과 딴판이었다. 자신이 좀 더 능숙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마음에 밀려들었다. 그러나 이진우처럼 적극적으로 나서는 수강생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었다. 


두려움은 누구나 안고 있다. 누군가는 자신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경계를 조심스레 넘어가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고 누군가는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 경계선에 다가가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다른 기질의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무언가를 배운다는 건단지 그 기술을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모르던 것을 대하는 태도가 실로 여러 가지일 수 있음을 배우는 장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이런 곳에서야말로 서로가 서로에게 스승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한 최현욱은 내심 이로미에게 고마워졌다


“아니에요. 아주 잘했어요. 이게 처음 해봐서는 원하는 색을 딱 맞게 찾아내기 쉽지 않죠. 미리 준비를 해놨어야 했는데, 제 실수군요. 이건 다음 시간까지 제가 좀 더 구비를 해 둘게요.”

“물감을요?”

“그렇다기보다는, 잠시만요.”


최현욱이 조금 허둥거리는 손짓으로 태블릿을 가져와 빠르게 인터넷을 열었다. 뭘 보여주려고 그러나, 눈이 반짝이는 수강생들의 시선을 받아내느라 그는 땀깨나 흘렸다. 마침내 원하던 이미지를 찾아낸 최현욱이 태블릿을 돌려세웠다. 


“와아.”


입을 모은 듯한 탄성이 터졌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언뜻 보아서는 마치 젓가락 받침처럼도 생긴, 작고 긴 직사각형 모양을 한 오종종한 도자기 조각 같은 것들의 무리였다. 어떤 것은 물방울 모양처럼 생긴 것이 가늘고 긴 접시 위에 조르륵 얹혀 있기도 했다.


“컬러칩이군요?”


형식만 다르지 익숙한 것을 많이 봐 온 윤소은이 금방 눈치챘다. 최현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이미지로 가득 찬 화면을 클릭해서 확대해 가며 설명했다.


“시편이라고 부르는 건데, 작가들마다 이런 방식으로 일종의 컬러 샘플들을 만들어 둔답니다. 당연히 준비했어야 했는데, 보시다시피 제 준비가 부족했네요. 사과드립니다.”

“아니에요, 선생님! 이렇게 보여주시니까 더 좋아요.” 

“근데 정말 작가들마다 컬러칩이 다 개성이 독특하네요. 장식소품 같기도 하고… 너무 예쁘다.”


재잘거리며 감탄하는 이로미와 김은지 옆에서 화면을 유심히 들여다보이는 이진우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리는 것을 발견한 최현욱이 웃음을 머금었다. 만져보고 싶은 거구나, 하고 그의 속내를 눈치챈 최현욱은 이왕지사 클래스를 시작한 거 제대로 만들어둬야겠다는 마음을 먹기에 이르렀다.


“컬러칩을 도자기로는 이런 식으로 만드는 거구나… 선생님은 무슨 색을 어떻게 섞으면 원하는 색이 나오겠다, 하는 게 머릿속에 다 있으시겠네요?”

“아무래도 그렇죠. 이건 어느 분야에서 일하건 누구나 비슷한 대답을 할 거예요. 음식 하시는 분들도 낯선 음식을 먹어봐도 감을 잡으시잖아요. 무슨 무슨 재료를 섞으면 이 비슷한 맛이 나오겠구나, 하는 감각요. 그건 정말로 정직한 노력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경험치인 것 같아요.”

“난 그런 거 좋더라. 치트키가 안 먹히는 거요. 공정하잖아요. 노력이 제대로 실력이 되는 거, 공정하잖아요.”


이로미가 강경하게 입술을 감쳐문 채로 고개를 위아래로 주억거렸다. 최현욱이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좀 뜻밖이네요, 그 말.”

“네? 뭐가요?”

“제대로 평가받는다는 말요. 사실 모든 종류의 평가란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지 않나요? 매사 공정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사는 게 공평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그럴 수 있는 부분에서는 공정해지기를 원하는 것 같아요.”


최현욱이 단순하게 제기한 의문에 자신도 모르게 가장 크게 반응한 사람은 윤소은이었다. 최현욱은 아마도 학생들이 교수의 평가가 공정한지 아닌지에 예민해하기 때문에 그러리라 미루어 짐작했다. 하지만 차분하게 말했어도 윤소은의 속은 새삼 들끓었다. 세상이 공정치 못하다고 느끼며 주저앉아 절망했던 시절이, 여전히 어제 있었던 일처럼 선명했다. 


-죄송합니다.


윤소은은 그 말이 의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심장이 사실은 쇠 같은 것으로 만들어져 있는 건 아닐까 의심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육중한 소리로 쿵, 하고 떨어질 수가 있을까. 머리까지 어질어질 흔들릴 정도의 진동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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