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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Jun 11. 2024

가능성에 관한 소고

3. 가능성을 닫지 마세요(5)

“왜, 시가 그렇잖아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말들을 나란히 줄 세워서 손잡아주잖아요. 그럼 신기하게 거기서 뭐가 그려지는 것 같더라고요.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요? 전혀 안 통할 것 같은 사람들도 막상 대화해 보면 이야기가 통하는 때가 있잖아요. 그런 것도… 일종의 가능성 열어두기 같은 거 아닌가요?”


모두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같이 이해한 척을 해야 하는 건지 가만히 있어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눈을 굴리던 이진우를 보며 이로미가 하하 웃었다.


“진우 씨, 괜찮아요. 지금 여기선 못 알아듣는 쪽이 젊어서 좋은 거야… 나도 못 알아들은 척할까 봐요.” 


수강생들이 각자 고른 안료를 보며 최현욱은 약간의 조언을 덧붙였다.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하지만, 여기서 보이는 색상이 똑같이 나오진 않아요. 그러니까 혹여라도 예상하신 것과 조금 다르게 나오더라도 너무 놀라거나 실망하진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기대한 색과 실제 발색 간의 차이를 맞추는 건 사실, 경험으로 해결이 가능한 부분이어서요. 세상만사 대부분의 일들이 그런 것처럼요.” 


자신 있게 붓을 대는 이로미와, 불안하게 연신 물감과 자신이 빚어놓은 접시를 번갈아 들여다보는 김은지, 드물게 즐거운 표정을 드러내며 들리지 않는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작업에 착수할 준비를 하는 이진우, 그리고 머릿속으로 어디에 무슨 색을 입힐지를 미리 계산하고 있는 듯한 윤소은에게 한 번씩 시선을 주던 최현욱은 찰나 수강생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대부분 알아차린 자신에게 놀라고 말았다. 


-어떤 공간 안에서 떠오르는 생각의 가짓수라는 게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단다. 사람 생각이라는 게 장소의 그물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지. 그러니까 내가 어떤 공간에 익숙해지면 말이다, 딱히 말이 아니어도 그 공간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대강 읽히는 경험을 하게 된단다. 


들었던 당시에 이해되지 않았던 말 한마디가 지금 또다시 그의 마음속에서 되살아나 이번에는 제대로 머릿속에 새겨지는 듯했다. 정말로 이곳은 내게 속한 공간이고 내가 누군가를 접대하고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는 장소였구나. 마음이 벅차오른 최현욱이 가까스로 한마디를 더 얹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절대 ‘망했다’라는 생각은 허락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세상에 망한 것은 없어요. 그저 그것은 원래 계획과는 조금 달라진 새로운 가능성일 뿐이니까요. 가보지 않은 길이 새로운 길이 될 가능성이 있는 법이잖아요.” 


작은 담소를 주고받으며 모두가 채색 작업에 몰두해 있던 와중에 김은지가 불현듯 뭔가 떠오른 얼굴로 물었다. 


“근데 여기에 이런 상가…라고 해도 되려나요? 여하튼 이런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건 살면서도 전혀 몰랐어요. 저 처음 여기 찾아왔을 때 무슨 다른 동네인 줄 알았어요. 가게들이 하나같이 예쁘고 특이해서.”

“그러니까요.”

“공방 건너편은 카페… 그리고 동물병원. 하나 더 있는 가게는 근데 뭔지 아직 잘 모르겠더라고요.”


저러다 거북목 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고개를 아래로 푹 떨구고 붓질에 몰입해 있던 이로미가 불쑥 머리를 쳐들고 크게 외쳤다.


“식당이요! 완전 예쁜 식당!”

“식당요? 생각도 못 했는데… 근데 여긴 식당이 있기엔 좀, 주변 상권이…”


슬쩍 좌중의 눈치를 살핀 김은지가 멈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여기가 섬처럼 똑 떨어진 느낌이긴 하죠. 그래도요, 뭐가 없어 보여도 제법 손님들이 많이 오가거든요. 식당 이름도 되게 귀여워요! 히요코 식당. 귀엽죠?”

“아… 그렇군요. 일본음식점인가 봐요.”

“그건 아닌데, 마크로비오틱 가정식을 하세요. 아까워서 먹지도 못할 만큼 아기자기한 밥상이 나오는데, 그게 막…아! SNS 촬영용 식탁 같달까.” 


마크로비오틱이 뭔지는 몰라도 뒤에 덧붙인 말이 너무나 직설적이어서 그 자리에 앉아있던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납득했다. 순식간에 홍조가 가득 퍼진 얼굴로 김은지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저도, 예쁘고 귀여운 거 되게 좋아하는데…”

“그래요? 그럼 다음에 같이 가실래요? 저 에이미 사장님이랑 엄청 친해요. 얼마만큼이냐면요,”


신나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이로미가 갑자기 찔끔한 듯 최현욱의 눈치를 살피더니 얼버무렸다.


“… 뭐 하여간 많이 친해요. 막 엄청 활달하시고 그런 건 아닌데 사람 편하게 해 주는 능력이 있으셔서.”

“그런 좋은 데가 있으면 다들 좀 더 친해지고 그러면 같이 밥 먹으러 가도 좋겠다, 그렇죠?”


윤소은의 말에 삽시간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찰나 아, 하고 자신의 이마를 가볍게 친 윤소은이 민망한 미소를 지으며 변명하듯 말했다.


“실례했어요. 생각해 보니 시대가 바뀌었는데 별생각도 없이 말해버렸네요. 요즘은 같이 밥 먹자는 말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건데.”

“아니에요. 전 같이 밥 먹는 거 좋아해요!”


버럭 고함치듯 말하는 이로미에게 윤소은이 옹호해 줘서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까딱 숙여 보였다. 이로미가 왠지 억울한 듯이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진짠데요? 우리 까탈쟁이 사장님하고만 아니면 누구든 같이 먹을 사람이 있으면 즐겁다구요.”

“진 사장님이 들으시면 서운하겠어요, 로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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