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화 Jun 07. 2024

하찮지만 묵직한 사소함

3. 가능성을 닫지 마세요(4)

최현욱이 조금 표정을 굳히고 힘주어 말했다. 최현욱의 확신 어린 말을 들은 뒤에야 김은지의 얼굴은 다소 편해졌다. 수강생들이 저마다 원하는 색을 고르는 동안 최현욱은 초벌구이를 하려고 준비해 두었던 작업물들을 스펀지로 조심스레 닦아내기 시작했다.


“어, 선생님, 그건...”

“개인적인 작업이에요. 혹시라도 먼지나 뭐 그런 게 묻어 있으면 채색할 때 걸리적거리게 되니까 미리 한 번 깔끔하게 해 두는 거죠. 여러분이 색 보시는 동안 겸사겸사죠, 뭐.”


잠시 망설이던 그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건 굳이 반복 연습해서 실력을 연마해야 될 정도로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빠트리면 안 되는 작업이거든요.”


일견 하찮고 별 의미도 없어 보이지만, 허투루 넘어가면 꼭 거대한 오점과 존재감을 드러내고야 마는 일들은 항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이다. 눈에 띄지 않는 번거로운 일들은 존재감을 무시당하면 반드시 언제고 어디에서나 ‘나 여기 있었는데…’ 하고 약을 올린다는 것 역시 최현욱은 바이올린을 배울 때 터득했다. 게다가 세상의 대부분의 일들은, 지겹고 따분한 일을 거듭 반복해야만 속도가 붙고 숙련도가 따라오는 법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한 뒤에는 어떤 일이건 제법 견딜만해졌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그런 진리를 터득한 덕분인지, 후에 도자기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아이작 노인은 최현욱이 나이답지 않게 꼼꼼하고 철저하다고 놀라면서도 영감같이 꼬장꼬장하다고 놀리곤 했다.


“그런데 선생님, 지금 얘기하신 거 같은 일은 무슨 일을 하든 꼭 있어요. 그치 않아요?”


이로미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말을 툭 던졌다.


“네?”


또다시 옛 생각에 빠져들 뻔했던 최현욱이 이로미에게 고개를 돌렸다. 물론 손은 여전히 부지런하게 놀리는 채로. 이로미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대꾸했다.


“귀찮다고 대강 넘기면 꼭 나중에 사달 나는 거요. 저 원두 로스팅하고 그라인딩 할 때 완전 많이 느끼거든요. 성가시다고 조금만 게으름 부리면 진짜 제대로 망하는 거예요, 완전. 그때까지 고생한 게 완전히 제로베이스로 돌아가는 그 기분은 진짜... 뭐라고 말로 못해요...”


이로미가 드물게 말꼬리를 흐리며 애잔하게 말을 삼켰다. 이로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군가 동조했다.


“맞는 말이에요. 저도 초년생 때 그런 일 몇 번 겪고 나니까 차라리 까탈스럽다는 말을 들으면 들었지, 대강은 못 넘어가는 버릇이 생기더라고요.”

“아, 알죠, 알죠.”


김은지와 윤소은이 격한 공감을 나누는데 그사이에 낀 이진우가 몹시 그럴싸하게 진지한 낯으로 고개를 주억이는 것을 본 이로미가 눈을 희게 떴다.


“아니, 진우 씨는 벌써 공감하는 거예요? 완벽주의자인가 봐.”


이진우가 몹시 당황한 기색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다급히 변명했다.


“어, 그런 게 아니구요- 그냥, 귀찮아서 넘어간 것 때문에 시간 지체되고, 했던 일 또 하고, 그런 건 좀 짜증 나잖아요.”

“음… 그건 확실히 맞는 말이긴 한데요,”

“네? 왜 그러세요, 선생님?”

“가끔은 거듭 반복하는 과정에서 미처 못 보고 넘어갔던 새로운 걸 발견하는 경우도 왕왕 있거든요. 엄격한 건 좋지만, 계획대로 완벽하지 않으면 ‘망했다’라고 생각하는 건 조금 지양하면 어떨까 해서요. 가능성이라는 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거라서.”


최현욱의 말에 전원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가 멋쩍은 듯이 목덜미를 어루만지다 결국 마음에 남아있던 말을 마저 꺼냈다.


“지연이라든가, 실수 같은 거요. 보통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거. 물론 매번 그러면야 안 되지만, 어쩌다 하게 될 때는, 여유를 갖고 한 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어서 말이에요. 내가 너무 마음이 급해서 서두르고 있던 건 아닐까. 주변을 둘러보라는 신호가 아닐까- 이렇게.”


윤소은이 눈치 빠르게 물었다.


“그거, 선생님 경험담이세요?”


최현욱이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네. 어떻게 아셨지…”

“아련한 표정으로 말씀하셔서요.”

“경험담이 맞긴 한데, 근데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저는. 조금만 더 여유로워지면 훨씬 더 많은 길이 보일 거예요. 꼭 잘 닦인 길만 길인 건 아니잖아요. 홀로 걷는 오솔길도 분명히 길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김은지가 불쑥 입을 열었다.


“오늘은 시 배우러 온 것 같네요.”

“네?”


이진우가 얼빠진 얼굴로 반문하는 동시에 최현욱이 아차 하는 얼굴이 되었다. 말을 꺼내놓은 김은지는 정작 입술을 꾹 붙인 채 고개를 숙여 유약통을 요리조리 살펴보는 척하느라 바빴다. 푹 수그린 고개 옆으로 보이는 귓불이 발그레했다. 윤소은이 주변을 스윽 둘러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나이 들어 좋은 점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엉뚱한 말도 느긋하게 듣고 다른 생각과 붙여볼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거요. 김은지 선생님이 말씀 잘못하셨다는 게 아니구요.” 


서둘러 말을 고친 윤소은이 이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것처럼 입술을 살짝 감쳐물었다가 시선을 들고 자신을 계속 주시하고 있던 김은지에게 눈을 맞추었다. 마치 강의할 때 미리 준비한 내용이 아님에도 저절로 나오는 말들이 있는 것처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말들이 줄줄 흘러나왔다.

이전 24화 누구나 어딘가에서는 초심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