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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May 31. 2024

형태로 남은 시간

3. 가능성을 닫지 마세요(2)

몇 시간을 함께 앉아있었던 것이 친근함까지는 가지 못했더라도 어색함을 없애는 데는 일조한 것이 틀림없었다. 윤소은이 공방에 들어서자 먼저 와 있던 이진우가 수줍음이 가시지 않은 태도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진우 씨. 어, 그거 뭐예요?”


가방을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놓으며 윤소은이 이진우가 만지작거리고 있던 것에 호기심을 보였다. 이진우가 그것을 불쑥 윤소은의 눈앞으로 들어 올려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어머, 세상에.”


이진우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은 풍경이었다. 짙은 풀색과 아이보리색, 차분한 자주색과 옅은 갈색이 어우러진 꽃송이들이 거꾸로 매달려 엮여 있었다. 이진우가 들뜬 소리로 설명했다.


“소리가 정말 예뻤어요. 선생님이 잠깐 위층 다녀오신다셔서 구경하고 있었어요.”

“아아.”


윤소은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크리스마스 로즈네요.”

“네?” 


이진우가 윤소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종의 역할을 하는 꽃송이를 가만히 쓰다듬어 본 윤소은이 말했다.


“크리스마스 로즈라는 꽃이 있는데, 이거 그 꽃을 모델로 만든 건가 봐요.”

“정답인데요. 그걸 알아보시는 분이 계실 줄은 몰랐는데.”


언제 공방으로 돌아온 건지 최현욱이 머쓱하게 웃었다. 풍경을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윤소은이 새삼스레 감탄한 듯이 몇 번이고 그것을 다시 눈으로 쓰다듬듯 느릿하게 살펴보았다.


“좋아하는 꽃이거든요. 키워본 적도 있고.”

“크리스마스 로즈를 키워보셨다는 분은 처음 뵀어요.”

“결국 실패했지만요.”


윤소은이 쓰게 웃고 화제를 바꾸듯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 이진우가 선생님이 위층에 다녀오신다고 했다던 말이 기억나서였다. 윤소은의 시선이 천장에 가 닿은 이유를 짐작한 듯 최현욱이 민망하게 말했다.


“핸드폰을 놓고 나와서요. 위층이 살림집이거든요.”

“아, 네.”


그 사이에 거꾸로 매달린 꽃송이 모양을 한 풍경을 집어 든 최현욱이 그것을 달아둘 위치를 고민하는지 문간 이곳저곳에 대어 보고 있었다. 그러다 말고 허둥지둥 들어오는 김은지를 위해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어서 오세요, 김은지 수강생님.”

“늦을까 봐 얼마나 서둘렀는지…”


김은지가 핸드폰을 살짝 건드려 액정에 뜬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도 10분이나 남았는데요. 너무 과속하신 건 아니고요?”


그 말의 어디가 우스웠는지는 몰라도 김은지가 새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덕분에 최현욱도 그 누구도, 김은지가 혼잣말처럼 한 번쯤은 해볼 걸 그랬네요, 라고 중얼거리는 것은 듣지 못했다. 역시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이로미가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제일 늦게 도착하여 허둥거리는 것을 시작으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자, 지난주에 여러분이 작업해 두셨던 접시를 초벌 작업까지 끝내 두었거든요. 혹시라도 본인이 만들었던 형태와 약간 다른 부분이 있다면 그건 너그러이 용서해 주세요. 초벌 끝내고 나면 깨지거나 할 위험이 있는 부분은 제가 조금씩 손을 봤어요.”


최현욱이 잘못을 비는 아이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용서를 들먹이자 산발적인 웃음이 터졌다. 어린 시절 만져보던 찰흙 덩어리와 크게 다를 것 없이 느껴졌던 흙이, 소꿉장난하듯 매만졌던 덩어리가 견고한 형태를 가진 무엇이 되어 앞에 놓여 있는 모습이 수강생들의 마음 어딘가를 건드린 듯했다. 설레는 감정이 물결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져, 최현욱도 잠시 입을 다물고 그 기분에 함께 젖었다. 십여 년 전 처음으로 스승의 앞에서 가마를 열던 긴장감이 그대로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자, 이만하면 감격은 충분히 하셨을 것 같고.”

“와, 선생님. 저 진짜 감동먹었어요. 그게, 진짜 그냥 주물럭거리고 노는 놀잇감 같은 그게 뭐가 되네요.”


솔직하게 자기 감상을 말하는 데 아무런 거침이 없는 이로미가 하릴없이 제 접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최현욱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테이블 밑 서랍칸에서 비슷한 크기의 접시를 꺼내어 자신의 앞에 놓았다.


“어머.”

“꺅-!”

“귀여워요.”


유일하게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은 사람은 이진우였다. 그러나 동그랗게 벌어진 입과 눈이 감탄사를 대신하고 있어서, 최현욱은 아주 조금 뿌듯해졌다.


“언제 이런 거 만드셨어요, 선생님?”

“개인 작업하는 틈틈이요. 저도 클래스가 처음인데, 나중에 이 수업을 돌이켜봤을 때 기억할 수 있는 기념품이 하나쯤 있으면 좋겠더라고요. 그래서 여러분이 만든 첫 작품에서 모티브를 좀 땄어요.”


평범한 크기의 동그란 접시였지만, 한쪽 끝에 작은 동물 얼굴 네 개가 조랑조랑 붙어 있었다. 얌전해 보이는 토끼, 눈을 일자로 모은 채 활짝 웃고 있는 것 같은 여우, 그 옆으로 긴 목을 쭉 뻗고 귀를 쫑긋 세운, 머리털이 덥수룩한 순한 눈매의 알파카와 두리번거리는 듯, 호기심이 잔뜩 어린 고양이. 이로미가 괴성에 가까운 탄성을 질렀다.


“선생님, 이거 조금씩 저희 닮은 거 같아요! 일부러 그렇게 만드신 거예요?”


최현욱이 멋쩍게 웃었다.


“아주 조금. 닮은 것 같아요?”

“네네네!”


이로미가 제일 가까이 얼굴을 들이댄 채 동물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 토끼는 엄청 조신해 보이는 게 소은 선생님 닮았고요, 여기 귀여운 고양이는 딱 은지 선생님인데요. 얘는 더벅머리인 게 진우 씨랑 딱 닮았다고요. 그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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