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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Jun 22. 2024

그냥 헤엄치는 거래,

콜린 후버, 우리가 끝이야

IT ENDS WITH US


우리랑 함께 끝나. 이건 우리로 끝나. 혹은 우리가 끝내(도록 하)자. 우리가 마지막이야.

번역자는 이것을 이렇게 옮겼다. 「우리가 끝이야」. 뭐가 끝인데?



책 뒤표지의 스포일링이 너무 강렬했다. 아, 이렇게까지 다 말해줘버리면 어떡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1/3쯤 읽어나가면 결말이 사실상 보이는데 결말이 플롯을 망치는 구조의 이야기는 아니라서, 그래서 출판사에서도 결말을 예상케 하는 단락을 뒤표지에 싣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이 소설은 온라인 서점에서 검색하면 하위분류로 이렇게 뜨는데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테마문학 > 사랑/연애/에로티시즘

나는 여기에 몹시 불만이 많다. 아냐, 아니라고. 분명 로맨스라는 장르의 문법을 치밀하게 따르고 있지만, 이 소설은 사회과학>여성학>여성문제 하위분류에도 넣어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하고 싶다. 잠시 언급하자면 나는 로맨스를 찾아 읽는 쪽은 아니다. 복합 장르일 때는 예외지만. 아무튼 그런 개인적인 취향을 알고 있는 지인 하나가 이 책의 제목을 슬쩍 들이밀었다. 저 위의 링크에서도 보이듯, '전 세계 틱톡 유저들이 사랑에 빠진 로맨스...' 어쩌고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싫어, 안 읽을래. 이미 독자도 많은데 왜 나까지? 라는 단호박 답변에 지인은 '글쎄 읽어보면 그 말 취소하고 싶어질 걸'로 응수했다. 흥, 그렇단 말이지. 두고보자. 그리고 넉아웃당했다. 이런 젠장, 이건 로맨스를 뒤집어 쓴 현실고발이잖아?


주인공은 첫장면부터 예사롭지 않게 등장한다. 고층 빌딩의 옥상 난간 바깥쪽으로 앉아 야경을 감상중이다. 하지만 주인공의 속은 들끓고 있다. 가정폭력을 일삼았던 아버지의 장례가 있었던 날이기 때문이다. 고인의 좋은 점이었나 훌륭한 점이었나, 아무튼 그런 걸 말해야 하는 추도사의 순간 주인공은 침묵해 버린다. 왜? 아무리 죽었더래도 아버지는 인간말종이었으니까. 그리고 하필 그 옥상에 우리의 남주가(남주인가, 과연...) 등장하고 두 사람은 약간의 설렘을 느낀다. 당연하겠지, 어쨌든 로맨스니까. 그리고 여차저차 이런저런 과정과 역경 같지는 않은 약간의 헛발질을 거쳐 두 사람은 연인 관계가 된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이 소설은 옷을 갈아입는다. 센슈얼 텐션이 분명히 높다, 라고 느껴지는 대목들이 있긴 있는데 그게 공포스러운 서스펜스로 뒤바뀌는 건 한순간이다. 독자가 여자라면, 도저히 주인공에게 이입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남자라는 존재 자체가 단 1, 2초 만에 나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음을 겪어보지 않은 운 좋은 여자는 세상에 몹시 드물다고 나는 꽤 자신한다. 주인공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순간, 이 소설은 더이상 로맨스가 아니다. 절대. 이건 많은 여자들에게 이미 일어난 일이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일어날 일이기 때문이다. 미안하게도, 공포스럽게도 정말 그렇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이 '사랑/연애/에로티시즘'의 분류 아래 있는 것이 못마땅하다. 그거 아니야, 아니라고.


미리 알려드린다.


1. 이 소설은 심각한 페이지터너다. 멈추기가 절대 쉽지 않다. 이 작가가 클리프행어, 달리 말해 후킹을 얼마나 잘 쓰는지는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잠깐 쉴까 싶은 대목에서 여지없이 그래서 대체 어떻게 되는 건데! 를 외치게 된다.

2. 세상의 많은 일들은 정말로 내가 당사자가 되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음을 절절하게 깨달을 수 있다.

3. 그래서 잠을 잘 수가 없다. 슬프기도 하고 분통 터지기도 해서. 그러니 이제 이 책을 읽을지 말지는 당신의 선택.


아래의 인용문은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으니 감당 가능한 분만 읽어보시기를 미리 권유드림...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을 전부 떠올려보세요. 정말 많죠. 그 사람들은 파도처럼 밀려와서 밀물과 썰물에 따라 들락날락하잖아요. 어떤 파도는 바닷속 깊은 곳의 무언가를 가지고 와서 해변에 놓고 가요. 바닷물이 빠져나가고 한참이 지나야 모래알에 새겨진 자국을 보며 파도가 여기까지 밀려왔었다는 걸 알 수 있죠. 아틀라스가 제게 말한 '사랑해'는 그런 뜻이었어요. 그가 맞아본 파도 중 가장 큰 파도가 저였다는 걸 알려주는 거였어요. 제가 너무 많은 걸 가지고 와서 바닷물이 빠져나간 뒤에도 제가 남긴 자국은 언제나 남아 있을 거라고요. -282쪽
"당신은 오빠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었고 오빠를 내가 생각지도 못한 사람으로 만들었어요. 여동생으로서 가장 바라는 건 당신이 오빠를 용서할 방법을 찾았으면 하는 거예요. 하지만 친한 친구 입장에서는 오빠를 다시 받아주면 다시는 당신과 말하지 않을 거라고 할 수밖에 없군요."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기까지 약간 시간이 걸렸고, 온전히 이해하고 나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409쪽
바깥에 있을 때에는, 학대당했을 때 두 번 생각해볼 것도 없이 떠나야 한다고 쉽게 판단한다. 나를 학대한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는 당사자가 아닌 경우에는, 그를 계속 사랑할 수 없다고 쉽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일을 직접 겪으면 나를 학대한 사람을 미워하는게 쉽지 않다.
그 사람이 하늘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지낸 시간이 더 길었으니까. -4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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