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키 스가루, 비록, 닿을 수 없는 너의 세상일지라도
기억과 정체성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인간은 기억의 연쇄를 통해 스스로를 쌓아간다. 조금 더 개인적인 견해를 덧붙인다면, 과거의 경험에 대한 정서적인 피드백을 통해 나라는 사람을 형성해 간다는 느낌이랄까.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자신의 정체성에 어긋나는 경험에 대해서는 인지적 조작마저 동원하면서까지 정체성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싶어 하지 않나.
어떤 세상이 있다. 이곳에서는 가짜 기억, 이곳의 용어를 빌자면 의억 義憶 이라고 하는 것을 이식할 수 있다. 그에 따라 의억기공사라고 하는 상상조차 못 해 본 직업군이 존재하는데 문자 그대로 이들은 신청자의 이력서를 받아보고 그에 따라 적절한 시나리오를 만들어 가상의 기억을 제작하는 일에 종사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누구나 필요하다면 당연하게 구입하여 사용할 수 있는 의료보조기- 아니, 솔직히 그것보다도 더 별 것 아닌 것처럼 취급하지만 -처럼 여긴다. 주인공의 부모처럼,
"의억이란 말이다, 의수나 의안과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결락된 부분을 보충하는 거야."라고 아버지는 딱 한 번 내게 말했다. "네가 어른이 돼서 자신에게 부족한 게 어떤 건지 알게 되면, 그땐 네가 알아서 의억을 사면 돼." -13쪽
이렇게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면 아무리 평범한 윤리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나 같은 사람조차도 어, 정말 그런가 하고 잠시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 목소리 큰 뻔뻔한 자들이여, 당신들의 무기가 가끔 부럽기도 하다.
여하간, 이런 부모 밑에서 자라왔으니 주인공이 평범한 사고방식을 가지기도 쉽지 않았으리라는 것도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주인공은 도대체 행복한 기억이라고는 먼지가 나도록 털어봐도 없는 그 시절의 기억을, 모조리 소거하고자 기억을 지우는 약물을 구입한다. 그리하여 클리닉에서 보내온 '레테(망각)'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원샷했으나 주인공은 기억을 소거하는 대신 엉뚱하게도 새로운 기억, 어찌 보면 추억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시절을 가진 사람으로 재탄생한다. 기억이 한 사람의 정체성과도 유사하다는 가정을 이어갈 때, 재탄생이라는 말이 억지스럽지는 않으리라.
한 시절을 소거하려 했으나 원치 않게 약물의 오배송(...)으로 그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뇌리 속에 선명하게 존재감을 빛내게 된 소꿉친구를 얻는다. 가상의 소꿉친구와의 추억으로 인해 그의 텅 빈 시절은 충만하고 아름다운 시절로 윤색되었다. 이 의억, 즉 가상 기억이 어찌나 현실감이 있고 아름다운지 주인공은 저도 모르게 존재할 리 없는 옛 소꿉친구에게 사랑의 감정마저 키우고 만다.
그.런.데,
분명히 존재할 수 없는 의억 속의 소꿉친구 그녀가, 갑자기 현실로 나타났다.
그것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친근한 태도로, 주인공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몰랐는데, 훨씬 예전에 나온 책이 다시 나온 듯. 제목도 바뀌어서. 이에 대해 기존 독자들의 원성이 꽤 높았던 듯하다. 나라도 그럴 듯. 제목까지 바꿔서 마치 신간인 듯 물타기하는 거...다른 책으로 속아본 1인으로서 굉장히 기만당했다는 느낌이 들어서 오래도록 언짢았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그건 그거고.
중반부까지 읽고 나서 도대체 이걸 어떻게 풀어가려고 이렇게 수습 불가능해 보이는 수수께끼를 만들어 두었을까 내심 걱정되기까지 했는데 오, 매끄러웠다. 납득할 수 있게 자연스러웠고 두 주인공의 사연이 안타깝고 사랑스러웠다. SF적 설정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엄연히 SF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즐겁게 읽었고 무엇보다도 작가의 상상력에 많이 자극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