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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Jul 15. 2024

어떤 사람이 될지를 선택하는 일

하지은, 녹슨달

“아니, 강해져야 한다는 뜻이야. 혼자 즐거워서 그림을 그릴 때는 잘 모르겠지만 정식으로 도제 과정을 밟기 시작하면 여러 가지가 힘들 거다. 그림이란 건 잘 그려질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거든. 또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될 거다. 자신에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이 좋은 그림인지 나쁜 그림인지, 앞으로 훌륭한 화가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 다른 사람들로부터 평가받고 이런저런 소리를 듣다 보면 그건 더욱 심해지지. 그래서 재능이나 다른 무엇보다도 여기, 이 마음이 튼튼해야 해.” -54쪽
“그곳에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 괴로움은 끝나지 않아. 이 길을 선택하면서부터 준비된 수순이지. 그렇지만 그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결코 괴롭기만 한 일은 아니야. 오히려 축복에 가깝지. 그곳으로 가기 위해 매번 같은 길을 걸을 의지가 있는 것. 기꺼이 괴로움의 길을 걷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예술가로서 스스로를 증명하는 일이니까.” -341쪽


http://aladin.kr/p/Xz3XL


주인공인 파도 조르디는 그저 그런 평범한 재능, 혹은 재능이라고 하기도 뭣한 정도의 기술을 가진 화가 아버지 아래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에게 예술적 열망은 넘쳐났으되 예술적 재능은 전무에 가까웠기에 그는 그 균열에 스스로 빠져 죽고 말았다. 아마도 그가 갖기를 염원했던 예술에 헌신할 수 있는 손이,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으나 그의 아들은 바란 적도 없었던 그것을 너무도 손쉽게 갖고 태어났음을 인지한 순간 생의 불공평함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것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주인공에게 예술이란 것은 어딘가 일그러져 있는 관념에 가까울 것이었다. 그 관념의 세계에서 실존적인 예술을 구현하고자 했던 파도의 분투기이자 성장기, 결국은 쇠락의 연대기라 할 수 있는 이 소설은 내내 애잔하고 안타깝다. 인간이란 어째서 이렇게 하나같이 자신만의 틀에 갇혀 버둥대다 죽고 마는지. 그게 인간의 삶이란 것인지.


자신이 뭔가를 갖고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떠밀리듯 그 세계에 편입해 버린 주인공은 당연히 환영받지 못한다. 시간과 노력을 쌓아 제 있을 곳을 만들어 온 노력파들에게 신이 내린 재능으로 단번에 그것을 뛰어넘어버린 천재는 달가운 존재가 아니다. 게다가 그 천재가 딱히 뭘 하고 싶다는 목표마저 희미할 때는 더더욱. 그러니 공방의 도제 생활은 결코 녹록지 않고 게다가 파도는 누군가의 중요한 비밀을 원치 않게 알아버렸다.

마침내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 일을 꼭 제대로 해내고 싶다고 마음먹었을 때 파도는 하필이면 그가 가진 모든 것,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긴다. 단 하나도 남김없이. 난생처음 제대로 된 포부를 가져보았는데, 꿈을 이루고 싶었는데 그 길을 가기 위한 모든 수단을 강탈당해 버린 순간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예술가로 자신의 이름을 남길 거라고 믿고 그를 응원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초조한 마음으로 읽어나가면서도 우리는 계속 의심할 것이다. 이게 될까, 정말 될까.


이제 겨우 세 작품째 읽어본 것이지만 하지은 작가도 비범한 재능을 타고 난 인물의 이야기를 쓰는 것을 좋아하시는구나,라는 생각을 얼핏 했다. 물론 세상엔 천재 이야기가 많고도 많지만 거기엔 또 얼마나 많은 변주가 있나. 그것도 그 천재가 보이지 않는 무엇과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이야기는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에 관계없이 내가 아는 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당신도 당신의 삶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군요. 당신이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와는 별 관계없이 나나 그쪽이나 별다를 바 없이 지독하게 힘든 건 마찬가지네요.


비록 그 천재와 나의 능력치는 하늘과 땅 차이겠지만. 제각각 자신의 자리에서 힘겹게 현실을 이겨나가고 있다는 동질성의 감각. 주인공이 다 때려 부수는 먼치킨물이 필요한 순간도 있고, 천재라고 해도 힘든 건 별반 다르지 않구나, 하는 동지의 기분이 필요한 때도 있다. 사는 건 다 그런 거니까.


“하지만 날 믿을 수가 없어요. 날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해요. 아무리 해도 안 될 일에 비참하게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단지 이 길을 너무 멀리 걸어왔기에 멈추거나 되돌아가는 게 두려워 떠밀려가고 있을 뿐은 아닌가, 그런 생각들을 해요. 목표로 하는 게 너무 멀어서 언젠가 이룰 수 있을 거란 희망도 현실감도 들지 않는다고요.” -3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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