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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Jul 29. 2024

그 장소, 그 시기에 각인된 당신에게 보냅니다

김민철,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

내게도 여행자로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통장에 돈이 고일 날이 없었던 날들이었다. 


비행기 삯이 되면, 어떻게든 나갈 짬이 되면 바로 항공권을 결제하곤 캐리어를 끄집어내 지퍼부터 열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던 기억이 있다. 여행지에서 따뜻하고 감사한 시간들을, 햇볕과 이야기를 모으는 프레드릭처럼 감질나게 모아 와선 평범한 날들 속에서 몇 번이고 꺼내보았다. 당시 서울의 우리 집에서 먹는 것보다 더 근사한 한식 밥상을 차려주셨던 에딘버러의 S님, 동양인을 쉽게 볼 수 없는 지역까지 찾아간 나를 마치 친손녀처럼 챙겨주셨던 B&B의 주인 할아버지 할머니. **, 잘못 탔어 내려! 를 외치며 20kg에 육박하는 캐리어를 플랫폼에 던지는 우리를 보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던 차장(이었을 거야 아마...) 아저씨. 폭설 사태는 자연재해이므로 배상의 대상이 아니라며 당당하게 나를 내려다보던 L항공사 데스크 직원. 으슥한 산길을 뚫고 사유지에 들어선 우리를 보고 혀를 차며 길을 가르쳐주던 산적 같던 아저씨. 틀린 발음을 바로잡아준다며 한참을 데리고 말장난을 하던 버스기사 할아버지. 


그 모든 게 흘러간 과거가 되고 추억이 되었다. 진작 좀 자세히 써두었으면 더 좋았을 걸. 빛바랜 사진을 들고 이게 누구였더라, 어디였더라, 더듬고 있는 기분은 여러모로 아쉽다. 


http://aladin.kr/p/uynTG


김민철 씨는 카피라이터이기도 하지만 작가로서도 꽤 여러 종의 책을 냈는데, 나는 알지도 못하는 이 사람이 참 좋은 사람이겠구나 여러 번 생각했다. 보지 못했어도 말 한 번 섞어보지 않았어도 그런 걸 확신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이런 내게 일찍이 언니, 단편적으로 보이는 모습들만 가지고 판단하지 말아요... 하고 아련하게 말했던 기자 후배가 있긴 했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은걸. 낯선 장소 곳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고, 세상이 조금이라도 옳은 흐름을 탈 수 있도록 손 하나라도 보태는 사람들에게 감동하고 응원하는 마음을 투명하게 내비치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는 쪽이 더 어렵잖아. 나는 그렇게 항변하고 싶다.


옆에 이렇게 좋은 친구들이 함께 있는데도 가장 좋은 순간이 되면 언제나 당신이 생각나네. 같이 있었으면 또 얼마나 좋아했을까. 같이 먹었으면, 같이 마셨으면 또 얼마나 웃었을까 자꾸 생각하게 되네. 병뚜껑이 습관이 아니라, 당신이 습관이 된 거야. -37쪽


밤의 곤돌라라니. 그 섬세한 순간이라니. 그 떨림 가득한 감정이라니. 그 한순간을 만나기 위해 그 비싼 티켓을 사고, 그 고생을 해가며 여행을 떠난 걸지도 몰라. 그 한순간만으로도 여행의 의미는 다 충족되고도 남아.
물론 그 순간이 뭐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 도대체 어떤 소용이냐고 묻는다면 입을 다물게 되지. 하지만 이미 경험한 사람의 별은 아무나 훔쳐 갈 수 없어. 그 별은 누구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는 너만의 별. 여행자라면 누구나 이마에 박고 살아가는 자신만의 별.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도 이마엔 자신만의 별이 박혀 있단다. 사막의 밤이, 파리 뒷골목이, 제주도 새벽의 들판 풍경이, 길모퉁이 평범한 카페에서 들은 음악 한 줄기가, 그림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흘린 눈물이 별이 되어 단단히 자리 잡고 있는 거지. 평생 떨어지지 않을 거야.  -57쪽


고맙습니다.
이 한마디가 또 이렇게 길어져버렸네요. 당신이라면 이 긴 대답을 다 이해해 줄 것만 같았어요. 제가 writer의 마음을 결코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당신도 서점의 영혼을 버리지 못하고 있잖아요. 그 모든 귀찮은 질문에도 불구하고 서점의 간판을 고집하고 있잖아요. 사장님 앞에서 writer라고 저를 소개한 것이 이쯤 되면 운명으로 여겨지기까지 하네요. 마법 같은 일이 우리에겐 일어나는 법이죠. 여행 중에는 좀 더 자주 일어나고요. 우리가 여행자의 영혼을 데리고 다니니 말이에요. 기꺼이 탄복하고, 사소한 물음도 오래 곱씹고, 매 순간 진심인 여행자의 영혼 말이에요. -94쪽


어쩐지 작은 메모지에 아주 가느다란 선을 뽑는 가냘픈 펜으로 빽빽하게 눌러썼을 일화들이 쪽지처럼 꼭꼭 접혀 가득한 상자를 열어 손 닿는 대로 하나씩 꺼내어 읽는 듯한 기분을 안기는 책이었다. 여행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던 시절, 여행이 금기가 아니었던 시기를 추억하며 보내는 연서들의 모음집이나 마찬가지여서 팬데믹의 시기에 읽었다면 훨씬 애틋하고 그리고 조금은 더 절실하게 여행이 그리웠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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