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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Aug 05. 2024

우리의 삶은 행성이며 항성이기도 해서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고요의 바다에서

어떤 글을 읽었을 때 선명하게 작가의 목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예요, 여러분...


그것은 가끔 들릴락 말락 한 다정하고 조곤조곤한 소리일 때도 있고 강경하고 우격다짐에 가까운 소리일 때도 있다. 귀를 가까이 기울여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나지막한데도 몸 전체를 바르르 떨도록 깊게 건드리고 가는 파동일 때도 있다. 에밀리 세인트존 멘델의 번역 신간은 명백히 맨 뒤에 해당된다.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죠. 그냥 매일을 사는 거예요.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치열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요. 현재에 충실하는 거예요. seize the day, live in the moment. 그렇게 말하는 에밀리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하고 싶은 말 한마디를 전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구상했을 그녀의 시간들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http://aladin.kr/p/8qFFy


이야기는 1912년으로부터 시작한다. 18세의 에드윈은 영국의 제국주의에 반발하는 언동으로 부모의 비위를 크게 거슬러 집안에서 내쫓긴다. 떠돌이의 신분이 되다시피 한 에드윈과 함께 방황하던 우리는 그와 함께 예기치 못한 기이한 현상을 맞닥뜨린다. 극렬한 신체적 거부 반응과 혼란함에 정신을 못 차리던 에드윈을 도와줄 듯 나타났던 낯선 신부는 금세 수상쩍은 사람임이 드러나고 자신을 신부라고 속였던 남자는 도망친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지려나 기대하는 순간, 첫 챕터는 생뚱맞게 막을 내리고 느닷없이 1912년의 에드윈은 사라진다. 우리는 이제 2020년의 현대로 건너와야 한다.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이 느닷없는 시공간의 도약은 「클라우드 아틀라스」와 유사한 종류의 당혹감을 선사하는데 그나마 다행이라면  「클라우드 아틀라스」처럼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가 계속 바뀌고 이야기가 뚝뚝 끊겨서 독자를 당혹시키는 일은 그나마 덜하다는 점이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 챕터와 챕터를 연결하는 모티브와 연속해서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세 번째 챕터, 심지어 2020년에서 2백 년이 더 지난 2203년에 도착하면 비로소 진정한 주인공이 누구인지 감을 잡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이야기는 오리무중이다.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지도 알 수 없고, 휙휙 바뀌는 시공간은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든다. 시간이 오락가락하는 걸 보면, 타임슬립물인가 생각할 수 있는데... 맞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더 이상은 스포일러가 되어서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이걸 말 안 하고 이 책 얘기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이 이야기는 타임슬립물이고, ******이며, SF이며, 기나긴 질문이기도 하다.

읽지 않은 독자를 위해 말할 수 없는 어떤 가설이 있다. 만약 그 가설이 진실이라면, 그 증거가 드러내는 진실을 알게 되면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당신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이 누군가의 생사를 뒤바꿀 수도 있는 일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퍼올릴 수 있는 질문은 끝도 없다. 


「꼭 끔찍한 사람이라야 시간 흐름을 의도적으로 바꾸려 드는 게 아니라는 사실. 그냥 잠깐 나약해지기만 해도 그렇게 돼. 그야말로 잠깐. 나약함이라는 말은, 인류애와 좀 더 비슷한 뜻이야.」 -241쪽


인간은 때때로 선의를 베푸는 것이 자신의 안위를 위협하는 일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제 몫의 안녕을 기꺼이 희생하기도 한다. 그것이 설령 가상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 숭고한 결단은 결코 작지 않은 경외감을 선사한다. 바로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 책을 추천할 이유로는 충분할지도 모르겠다. 


그 거리들에서는 모두가 나보다 빨리 움직였지만 그들이 모르는 사실은 내가 이미 너무 빠르게, 너무 멀리 움직여 본 적이 있으며 더는 여행하고 싶지 않다는 점이었다. 나는 최근 시간과 움직임에 관해, 끊임없는 몰아침 속의 고요한 점이 된다는 것에 관해 아주 많이 생각해 왔다. -3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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