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화 Oct 29. 2023

보편적 감정이란

하지은, 얼음나무 숲


모든 서사의 기본 뼈대는 결국 인간의 보편적 감정에 바탕을 둔다. 복수담이건, 성장담이건, 연애담이건, 대체로 한 인간이 엮어내는 내러티브를 추동하는 힘은 보편 정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를 개고생 시킨 놈? 너도 당해봐라. 얄미워 죽겠던 인간인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좀 달리 보이네? 근데 왜 저 밥맛이 갑자기 신경 쓰이고 난리야? 이런 거 말이다. 내 얘기 아니어도 쉽게 이입할 수 있지 않은가(최소한 납득이라도).


모티브는 보편적이어도 서사는 개별적이고 독자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이야기로서의 가치가 있다(라고 생각한다). 흔히 쓰이는 모티브로서, 감정 동기 중의 하나가 열등감, 인정 욕구다. 다른 말로 하면 클리셰는 쓰더라도, 디테일은 달라야 한다. 그건 그냥 쓰는 사람이 당연히 갖춰야 할 기본이다(최근 이슈가 된 일 때문에 열이 나서 한 줄 추가해 보았음).


오늘 막 그런 이야기를 하나 읽었다. 음악에 평생을 바쳐온 두 젊은 음악가. 둘 중 하나도 빠지지 않고 열등감과 인정 욕구로 찌들어있는 상태다. 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의 인정을 갈구하고, 이 사람은 또 누군지도 모를 미지의 인물의 인정을 욕망하면서 병들어간다.


이 두 감정이야말로 현대에 가장 팽배한 정서가 아닐까 싶은데... 이 작품은 명쾌하게 해답을 던져준다.


이렇게까지 가르쳐 주는데도 모르면, 전들 어쩌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작가의 목소리를 들은 기분이었다.


       


얼음나무 숲 | 저자 하지은 | 출판 황금가지 | 발매 2020.03.20.



배경 자체가 가상의 세계인 데다 판타지적 설정이 들어있어서 거부감을 느낄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음악을 운명에 가까운 평생의 업으로 여긴 자들이라면 숙명처럼 안고 가는 질투와 동경을, 삶과 감정의 서사를 이렇게 현실적으로 강렬하게 묘사한 작품은 오랜만에 봤다.


누군가를 질투하는 마음을 무조건적으로 추앙하는 마음으로 가리는 태도와 자신의 열등감을 상대를 무시하고 경멸함으로써 무마하려 하는 습관, 누구나 알지 않나.


그러나 그런 '관념적'인 태도의 문제가 어떤 인물의 몸과 말을 입는 순간 독자에게 다가설 때 그는 더 이상 평면의 인간이 아니다. 납작하되 납작하지 않은, 실존인물만큼의 현존감과 실재감을 갖고 눈앞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본인이 이미 위대한 피아니스트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갖추었음에도 자신을 스스로 믿지 못하는 고요. 그는 자신이 무조건적인 동경을 바치는 대상인 바옐이 늘 찾아 헤매던 단 하나의 청중, 그의 음악을 진실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자가 되고 싶어 한다. 달리 말하면 그는 모두가 칭송하는 천재인 바옐의 인정을 받는 단 한 사람이 되려 애쓴다.


작중 화자인 고요가 자신이 스스로를 인정하기보다,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독자는 알 수밖에 없다. 타인의 인정을 받는 것이 삶의 목표인 사람은 결국 자신을 착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고요는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끌려다닌다. 어쩌면 자신이 내내 동경해 오던 그보다 예술적으로 더 나은 평가를 받는 연주자일수도 있다는 사실, 인격적으로 고결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자신의 독단적이고 무지성적인 편견 아래에서 오래도록 신음하게 둔 채로.


그는 동경하는 자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자신에게 무자비하다.


고요의 친구이자 라이벌 음악가인, 천재로 칭송받는 바이얼리니스트 바옐. 그는 오만한 천재다. 타인의 평가에 괘념치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무시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 역시도 지독한 자기혐오와 시기심에 사로잡힌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별 의미도 없고 실체도 없는 '자신의 음악을 이해하는 한 사람'에 대한 집착으로 실제의 대인관계를 소진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소위 고구마 백 개 먹은 것 같은 심정으로 가슴을 두드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그 역시 형체도 없는 망령에 사로잡힌 영혼인 것이다.


이렇게 맹목적인 감정이 여기저기서 넘쳐흐르는 이야기는, 자칫 잘못하면 읽다 체하기 십상인데(그래서 종종 더 이상은 못 읽어, 하고 읽기를 그만둔 소설이 몇 권이던가...) 요즘 소설들은 오히려 그 반대랄까, 어째선지 감정결핍에 가까운 인물들이 많아서 그건 또 그 나름으로 읽기가 상당히 힘들었더랬다.


이렇게 앞뒤 가리지 않고 저돌적인, 날것에 가까운 감정들이 맞부딪치며 빚어내는 소설이 질척하지도 유치하지도 않아서 정말 좋았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감정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누군가는 쓰러지기도 하고 누군가는 자기 자신과 극적인 화해를 이루기도 한다. 그 모든 제 나름의 드라마틱함이 삶이다. 그런 것이 소설이라고, 소설을 읽는 이유라고 다시 생각하게 해 준 책이었다.


"미려하고 화려하며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결국 속을 뜯어보면 한 음악가의 처절한 절규가 담겨 있는 그 음악 말씀이시군요."

"...... 당신은, 정말 들을 수 있군요."

"글쎄요. 단순히 글자를 읽을 줄 아는 것과 글을 볼 줄 아는 것과 그 글에서 감동을 느낄 줄 아는 것은 다르지요."

나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바옐처럼 키욜 백작도 음악을 글에 비유했다. 그렇다면 그도 알고 있는 것인가. 음의 언어를.

"역시 당신이...... 그의 하나뿐인 청중입니까?"

내 물음에 키욜 백작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이지 지나치게 깨끗한 동경이군요."

-p.291


우리가 흔하게 가질 수 있는 자기 소모적 감정들이 얼마나 인간을 갉아먹을 수 있는지가 궁금한 분들께 추천하고, 환상문학이 잘 맞지 않는 분, 고전음악을 썩 좋아하지 않는 분, 극한까지 내달리는 갈등을 읽어가는 것이 심적으로 힘든 분께는 굳이 추천하지 않겠습니다. 특히 나는 이렇게 죽어라 노력하는데 왜 보답받지 못하는가... 라는 것이 보기 괴로운 분은 스킵해 주세요(그 묘사가 너무 처절해서 이입이 강하게 됩니다...)




2023. 8. 2

매거진의 이전글 과거의 리뷰들, 그리고 아마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