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라,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정보라 작가의 책을 온전히 다 읽은 것은 「저주토끼」가 유일하다. 엄청난 이야기꾼인 것도 알겠고, 이야기 하나하나가 굉장히 흥미로운 것도 공감하지만 정보라 작가의 책을 이후로는 잘 못 읽었다.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나는 무서운 이야기를 싫어한다. 그렇다고 호러물을 못 보는 것도 아닌데 그저 괴담을 잘 읽지 못한다. 그래서 남들이 다 재미있다고 엄지를 치켜드는데도 못 읽고 못 본 것들이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이 책을 쉽게 손에 든 이유는 무엇일까.
순전히 문어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문어를 좋아한다.
식자재로써도 좋아하는 걸 부인할 순 없지만(.......) 일단 생물종으로서 문어를 몹시 좋아한다. 세상에 이렇게 흥미로운 생명체가 흔치는 않다. 적어도 내게 문어는, 공포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가장 어질고 너그러운 현자처럼 양가적으로 존재한다. 문어라면 공포 소설이어도 읽을 수 있다(이미 거하게 훈련받은 바가 있으므로).
연작소설이라는 소개문이 붙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이 작은 이야기들은 하나의 세계관과 동일한 주인공을 화자로 갖는다. 초반부를 읽다 까무러치게 웃었던 나는 당장 핸드폰을 들어 책 이야기를 가장 자주 나누는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웃곀ㅋㅋ](실로 없어 보이지만 실제 이렇게 썼으므로 현실감을 위해 그대로 옮겨 씀). 답신은 금세 떴다. [정보라가? 웃기게 썼다고?]
그러니까 나의 편견은 나만의 편견은 아니었던 거다.
그리고 책을 다 읽어가던 이튿날 나는 전날 보냈던 톡을 주워 담고 싶어졌다. 이건 그냥 웃기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었으므로. 그간 책은 어디로 읽었던 것인가. 앞부분만 읽고 이런 섣부른 판단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릴 일이 아니라는 걸, 그간의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었을 텐데 어제의 나는 도대체 뭐에 취해 있었던 것일까 싶어서.
우리는 항복하지 않는다. 나와 위원장님은 데모하다 만났고 나는 데모하면서 위원장님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래서 지금도 함께 데모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교육 공공성 확보와 비정규직 철폐와 노동 해방과 지구의 평화를 위해 계속 함께 싸울 것이다. 투쟁. -46쪽
책을 쭉쭉 넘기며 마주쳤던 이 문단을 웃음을 삼키며 넘겼던 기억이 몹시 민망해지고 송구한 마음이 치솟는 데는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였고, 책을 다 읽고 작가(혹은 번역자)의 후기를 읽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책 말미에 이르러 잠시 사고가 정지했다. 정보라 작가의 말을 읽은 순간 마음이 무거워졌고 거북스럽고 무안한 한편 어떻게든 나 자신을 변명하고 싶어지는 욕구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비로소 알게 된 사실, 이 책은 정보라 작가의 자전소설이라는 정보에 즐겁게 씹어 삼켰던 이야기가 뱃속에서 요동치는 기분이 들었다. 억지로 눈물을 머금고 씹어 삼켜야 했던 산낙지가 마치 위장을 긁으며 나를 내보내달라는 듯한 착각에 휩싸여 괴로워했던 것처럼.
초반부의 즐겁고 유쾌한 소동은 갈수록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묵직한 메시지고 작가의 주제 의식이다. 불편하다면 불편한 현실 인식에의 요구이고 올바른 직시 간구이다. 강인한 문어 빨판 같은 흡입력을 가진 이야기에 기댄 시의적절한 문제 제기이기도 하고.
“안 싸울 수는 없잖아요.”
남편이 돌아누워 나를 쳐다보았다.
“열받으니까.” -67쪽
이 남자와 결혼한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질 줄 알면서도,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언젠가는 끌려 나가 사라지더라도 어쨌든 끝까지 고개를 높이 들고 목청껏 외치면서 사라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인간을 위해서든, 난데없이 등장한 대게를 위해서든 말이다. -69쪽
사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이렇게 절망하고 모든 것을 포기했는데 너는 왜 나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아? 너는 왜 불행해지지 않아?' 그들은 사회 전반적인 절망과 불행의 원인이 독재자와 그를 비호하는 정권에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주변의 건강한 사람들을 불행하고 망가진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독재 체제와 공포정치는 이렇게 해서 마음이 꺾인 사람들을 대량으로 양산한다. -225쪽
그러나 인간이 그러하듯이, 물리적 실체를 가진 몸 안에 갇혀 고립된 자아를 가지고 살아가는 지적 생명체는 결국 자신의 주관에 따라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248쪽
뱀발.
표지에 왜 문어가 있는지, 위원장님이 문어인지 문어 비슷한 것인지를 잡아먹는 에피소드와 기타 문어가 등장하는 모든 대목에서 문어가 어떤 상징적 좌표에 놓여 있는지를 추측하며 읽으면 좀 더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소심한 생각을 해 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