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아람, 쓰는 직업
인생 최초의 글쓰기 기억을 되짚어 보면 그건 아홉 살 혹은 열 살, 그 어디쯤에 머물러 있다. 물론 여기서 글쓰기라 함은 일기라든가, 글짓기 같이 학교에서 시켰기 때문에 해야만 하는 그런 의미의 작문은 해당되지 않는다. 순전히 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자발적으로 썼던 첫 글을 의미한다. 내용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글을 썼을 때의 두근거리던 설렘이나 들뜸 같은 것은 여전히 기억한다. 어린 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내게 금장 만년필을 한 자루 주었고(아버지가 받으신 선물이었고 아버지가 쓰시지 않는다고 하여 내게 넘어온 것으로 기억한다), 파란 잉크를 채운 그 만년필이 얼마나 어린 글쟁이의 마음을 설레게 했는지도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굉장한 부끄러움으로 뒤덮인 나머지 다시 들춰보기도 싫은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왜냐하면 내가 써 놓았던 그 짤막한 이야기를 끼적이다 말고 어린 초등학생은 그대로 엎어져 잠들었고, 쪼그만 애가 쓰다 만 이야기가 귀엽고 예뻤던 엄마는(같은 시기를 지나 본 사람으로서 그때의 엄마 기분을 알게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그러셨으면 안 됐다고 생각한다 ㅎㅎㅎ) 그 꼬맹이가 써둔 몇 줄의 문장을 또박또박 정서해 두셨다. 물론, 수치심은 온전히 나의 몫. 그래서 꼬맹이는 다시는 글을 쓰지 않았고, 누가 봐도 남부끄럽지 않은 그림으로 방향을 틀어 무려 미대까지 졸업하게 되었다는... 그럼에도 결국 글로 돌아갔다는, 웃기지도 않은 옛날이야기를 한 이유는 지금부터 말할 책의 서문에 등장하는 대목에 마음이 크게 울렸기 때문이다.
냅의 이야기와는 결이 다르지만 나와 일 사이의 서사도 러브 스토리다. 사랑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대체로 지긋지긋하지만 때론 신선하고, 매일 헤어지고 싶으면서도 가끔 그립기도 하며, 1년에 360일쯤 만난 걸 후회하지만 나머지 5일 정도는 아, 네가 너라서 참 좋다 싶은...... 끝내자니 아쉬워서 결국은 청산하지 못한 관계. 애증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그런 관계도 사랑이라는 걸. -6쪽
무엇을 쓰건 쓰는 사람은 -뭔가를 창작해 나가는 사람이라면 다 같은 결의 욕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세계를 축조해 나가는 데 진심인 듯하다. 대체로 글이든 뭐든 밥벌이를 하기 위해서는 온전히 자신만을 독자(소비자)로 상정하고 쓸(만들) 수는 없기 때문에 타겟 독자(이하 치환 생략)의 니즈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러다 보면 순간순간 내가 이걸 좋아해서 여기 뛰어든 건 맞는데 이렇게 하는 게 정말 맞는 건가 싶은 회의가 순간순간 찾아든다. 하지만... 그게 맞더라. 어떤 일을 사랑해서 그 판에 몸을 담았지만 어느 순간 찾아드는 환멸에 자괴감을 느끼는 순간은 어떤 직업인에게도 찾아오는 게 맞다. 그런 자명한 사실을 잊을 때가 적지 않고, 그런 때마다 이런 진솔한 직업인의 글들이 우리를 일으켜 세워준다. 다 그렇다고. 다들 그렇게 버틴다고.
의사들이 현장에서 자신들만 아는 의학 용어를 쓰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일에 '노동의 말'을 부여한다. 일상어로는 정확하게 표현되지 않는 일의 감각, 외래어를 써 낯설게 함으로써 조금이나마 거리 두어 눅이는 일의 고됨...... 노동어는 순화되기 힘들다. 일이란 항상 날것이기에 일터에선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언어를 쓰는 편이 일에 집중하는 데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49쪽
이런 대목을 만나면 그들의 고충에 함께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고 -기자들이 일본어를 섞어 쓴다고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나-,
인터뷰이가 딱히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자기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꾸미고 싶은 욕심이 있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기 말에 도취돼 허풍도 치고, 거짓말도 살짝살짝 하게 된다. 그런 요란한 말에 현혹되지 않고 팩트만을 걸러내는 것이 기자의 임무다. 경계와 의심 없이 인터뷰이의 말을 그대로 받아쓴 기사는 역겹다. -108쪽
지극히 인간적인 본능에 충실할 뿐인 인터뷰이의 귀여운 허세를 낱낱이 벗겨내는 악역도 종종 맡아야 한다. 저자는 그렇게 배웠고 자신의 직업윤리에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기에, 어린 시절부터 존경해마지 않았던 번역가이자 작가인 신지식 선생을 만났을 때조차
존모하는 마음을 감추고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기자의 의무라 믿었기에 나는 이날도 역시나 공격적인 질문을 빼놓지 않았다. -111쪽
이렇게 질문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움에 대한 강박이 꼭 좋은 작품을 낳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의 어느 순간부터 사람은 자기가 제일 잘하는 것을 기반으로 싸우는 편이 낫다. 훌륭한 예술 작품은 대개 평생의 주제에 대한 변주다. (...) 그렇지만 실패할지언정 끊임없이 시도한다는 행위의 문학적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다. 결과물의 아름다움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상관없으니 일단 해보자는 마음, '나만 아는 그 아름다움'이 창작자들을 충족시킨다. -134쪽
간혹 이런 문장을 만나면 궁금해진다. 곽아람 기자는 어느 순간 이런 통찰을 얻었을까.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절로 체득한 것일까. 그렇다면 귀 기울여 듣는 일에도 모종의 예술적 승화의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이해해도 되는 것일까.
마치 요리책을 잔뜩 수집하면 저절로 손맛이 좋아질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처럼, 글 쓰는 방법과 쓰는 사람들에 대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으면 글재주가 조금이나마 나아질 거라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그 시기의 버릇이 그대로 남아 여전히 (읽는 것으로 채워지는 부분도 분명 있지만 어디 그뿐이겠는가) 글 쓰는 일과 쓰는 사람에 대한 책들을 많이 읽는다. 눈으로 주워 담는 동안 뭔가가 남기는 할 거라는 몹시도 허무맹랑한 맹신이 여전히 마음 어딘가에 잡초처럼 남아 있기 때문이겠지. 그러나 의도가 어떻건 간에 어떤 일들을 성실하게 오랜 기간 행해 온 사람들의 글에서만 만날 수 있는 뭉클함이 있다. 서문에서 그가 밝혔듯 이것은 그와 일 사이의 오랜 사랑 이야기이고, 대체로 사랑이란 대중들이 가장 쉽게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반면 가장 성취하기 어려운 종류의 그 무엇이니까. 일과의 사랑 이야기에도 한두 마디로 요약할 수 없는 드라마가 존재하게 마련이므로.
뱀발. <노벨 문학상 발표 날>이라는 글이 이 책을 읽은 시기와 맞물려 아주 재미있었다. 문학상 발표가 임박한 시즌의 관련 업종 종사자들의 심정을 이렇게 생생하게 묘사한 글은 어디서도 못 봤다.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이 알려졌을 때 이분들의 표정이란 어렵잖게 상상이 가는데, 가장 기뻐했을 곳은 역시 출판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