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선우, 0000
장 르누아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들뿐이다." 이 문장을 읽었을 때(어디에서 읽었는지는 잊어버렸다) 나는 두 가지를 생각했다.
1. 그림만 잘 그리는 줄 알았는데 말도 멋있게 하네...
2. 기억이란 건 골다공증에 걸린 뼈보다도 부실한 것이어서 영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는데 어쩌라고.
둘 다 교정이 필요하다.
1. 그림을 그렸던 르누아르는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다. 장 르누아르는 그의 아들이다. 이래서 사람 이름을 똑바로 기억해야 한다.
2. 그러므로 기억을 보조하는 도구로서 기록은 필수적이다. 창작은 힘든 거지만 기록은 그래도 할만하지 않나. 하다못해 맘에 들었던 문장을 베껴 써 두는 것만이라도 하자.
글의 품질은 일단 밀어 두고, 뭐라도 끼적여 놓는 습관을 들인 데는 개인적인 이유가 큰데 그게 바로 2의 사유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무엇이라도 나불거려 놓은 책들은 대체로 기억에 오래 남아 있었다. 이런저런 개인적 사유로 책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경우가 잦은데 그 어느 때보다도 (나름 노력해서;;;) 열심히 끄적여두었던 작년만큼은 레퍼런스로 들 수 있는 책이 많이 떠올랐다. 솔직히, 몇 줄이라도 써두었던 덕을 본 바가 컸다. 그래서 힘들어 죽겠지만(잠깐 울고 가기로 한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올해도 부지런히 짧은 감상이라도, 아니면 쓰잘데기라고는 1도 없는 사적인 투덜거림이라도 늘어놓기로 굳세게 마음먹었다.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지만 논픽션보다 픽션이 더 빠르게 산화 돼버리는 괴상한 뇌의 소유자인 관계로... 더 잊어버리기 전에, 어제 후루룩 읽었던 책을 말하려 한다.
위즈덤하우스에서 단편소설 시리즈를 발간하고 있는데, 엽편과 초단편의 중간 지점쯤에 있는 길이의 이야기들이다. 길이가 길이니만큼 엄청난 갈등은 나오지 않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재들을 다룬 이야기가 많다(저 많은 시리즈 중에 꼴랑 다섯 권 읽어보고 속단할 일은 아니지만 그런 느낌이다).
위픽 시리즈를 처음 손에 들면 누구나 당황할 거라고 생각하는 이 디자인의 특별함이랄까 괴상함이랄까, 전면에 보이는 저것이 제목이 아니다(띠지는 못 본 것으로 하자). 제목에 자그맣게 보이는 것이 제목인데, 몇 번을 속았음에도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까지도 이 책의 제목이 「다음에 또 만나자고 전해주세요」인 줄만 알았다. 최근 소설들의 제목이 문장형으로 나오는 경우가 그리 드물지 않은 데 영향을 받은 점도 적지 않았다. 속았다, 속았어.
아무튼 이 이야기의 첫 문장은 나를 식겁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화자는 작품을 연재 중이었던 작가인데, 무려 마감일에 납치를 당했다는 말로 서두를 연다. 이런 비극이 있나. 작가와 편집자 양자에게 모두 엄청난 재앙이자 비극이다. 대체 왜, 누가 뭣 때문에 마감 때문에 발등튀김이 된(이 말이 낯설 분들을 위하여 발등튀김 짤을 넣어보겠다. 대략 이런 상황이다)
공감하셨으리라 믿고 넘어가겠다.
여하튼, 대체 누가 발등이 튀겨진 작가를 납치한단 말인가. 그건 미저리에 등장하는 애니 윌킨스쯤 되지 않고서는 하지 못할 일이다. 범인이 누군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 단편의 장르가 호러인가 스릴러인가를 가늠해 볼 때쯤, 독자는 의외의 답을 얻는다. 화자는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죽었고 저승으로 가던 그의 영혼을 납치한 것은 한 마리의 고양이었다는 사실을. 이 깜찍한 납치범의 이름은 '오후'다.
그에게 꼭 뭔가를 물어보고 싶었던 납치범(...)에게 도움을 주면, 원래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는 놀라운 사실은 덤이다. 고양이는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보은하게 되어 있는데(고양이의 보은을 떠올리셨습니까? 저도요), 그 경우엔 특별히 되살아나는 특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어마어마한(화자에게도 눈이 댕그래질 만큼 땡큐한 특전인지까지는 따지지 않기로 하자) 특혜를 내세우며 고양이가 도움을 달라고 하는 문제는 순간 화자는 물론이고 이야기를 열심히 따라가던 독자마저 황망하게 만든다. 그게 무엇이냐면, 여기서 말할 수는 없지요. 이 소설이 길면 얼마나 길다고 그런 걸 스포할 수는...
고양이들이 영역 동물인 이유는 지난 생에 만났던 소중한 존재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야. 한 번의 생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지만,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마음은 무한하니까. -35쪽
오랫동안 죽어 있다 보면 그리운 것이 많아지거든. 살아 있을 때의 감각들, 그러니까 너무 오래 달릴 때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느낌, 고단한 하루 끝에 잠에 빠져드는 순간, 돌아다니면서 맡았던 모든 냄새들,... -47쪽
사랑하는 대상에게서 멀어질수록 희미해지는 게 존재감이라면, 나는 현실에 발 디디고 있다는 감각조차 사라졌을 정도로 사랑과 멀어진 것이다. -61쪽
오후가 느릿느릿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귀 기울여 들은 것은 화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 역시 숨죽이고 그의 지난 삶들을 천천히 따라 읽었다. 이 소설을 읽게 될 미지의 독자들도 분명 비슷한 마음으로 그럴 것이라는 모종의 믿음이 어느새 내 안에 생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