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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계속 싸우고 있다

에이미 립트롯, 아웃런

by 담화

도저히 홀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거대한 절망 앞에 부닥쳤을 때,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삶을 놓아버린다는 선택은 젖혀두고 남은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그중 어떤 이들은 삶을 기록하며 자신이 있을 곳을 만들어 나간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알츠하이머 환자인 동시에 알츠하이머와의 전투 최전방에서 싸우는 투사인 웬디 미첼이 그런 사람인데(그리고 아직 살아 계신 듯), 이 책을 통해 한 사람을 더 추가하게 되었다.


심각한 알콜중독자였으나 저널리스트로 자신의 삶을 다시 일으킨 에이미 립트롯의 「아웃런」을 읽었다.


http://aladin.kr/p/AeWHL


아마도 보통의 독자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겠지만, 나를 반 미치게 했던 건 표지의 식물의 정체였다는 점을 먼저 짚고 넘어가자. 혼자 머리를 굴리다 못해 챗지피티와 손가락을 맞대고 진지하게 상의했다.


커버 이미지를 건네주고 이거 뭐 같아 보이냐고 물었더니 녀석은 멕시칸 히더 같은데, 하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야 성의를 좀 보여봐. 만약 이게 스코틀랜드 북쪽 제도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식물이라면(여기서부터는 순전히 나의 뇌피셜이었다), 그럼 후보군 좀 좁힐 수 있지 않겠어? 너한테 머리가 없는 건 아는데 머리 비슷한 것 좀 써보라고 닦달을 했더니 그럼 히더일걸? 하고 대답했다가 얼른 이렇게 덧붙였다. 있지, 히더는 산성에 배수가 잘 되는 토양에서 잘 자라. 오크니 제도(작가가 거주했던 곳이자 그녀의 고향)에서 완전 흔하게 볼 수 있어. 빽빽한 덤불로 자라는 게 네가 보여준 책표지 식물하고 아주 닮아 보여.

뭐, 그렇긴 한데. 히스 꽃(히더)은 어떻게 봐도 저런 느낌은 아닌데... 하고 나는 일말의 의혹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뭐랄까 이 회고록의 전반적인 이미지와 히스는 너무 잘 어울려서 대강 '그래 히스로 치자' 하고 마침내 의문의 표지 식물과 극적 대타협을 이루고... 표지를 넘길 수 있었다는, 이런 뻘소리를 왜 했지...


여기까지 오기까지, 내 상황을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더 어릴 때에는 내가 서른 살에 중독 치료소에 가게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삶이 기대하거나 바란 대로 풀리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는 건 사실 그동안 내가 무척 운이 좋았다는 말이기도 했다. -102쪽


인간은 가정법을 좋아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행복한 망상에 한해서다. 이를테면 로또 1등을 맞으면 뭣부터 할까 하는 그런 거 말이다. 그 누구도 내 인생이 진창에 굴러 떨어지면 어떻게 할까를 공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순간이 갑자기 들이닥쳤을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기록광인 나는 작은 수첩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그걸 적어둔다. 너무 힘들 때, 나 자신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 할 수 있을 일들. 해야만 할 일들의 목록을 적는다.

예를 들어 일주일치의 원두를 갈아 담아 놓는다든가, 그릇장을 비워냈다가 꼼꼼히 하나씩 닦아 다시 제자리에 올려놓는다든가. 베껴두고 싶어서 플래그를 붙여두었던 페이지들을 다시 한 장씩 넘겨본다든가. 별로 대단한 생각이 필요하지도 않고, 엄청난 노력이 들어가지도 않지만 시간은 잘도 흘려보낼 수 있는 그런 일들.

버텨야만 하는 시간 속에서 나를 놓치지 않을 수 있는 일들은 중요하니까.


나도 이 섬에 다시 밀려왔다. 술을 끊은 지 아홉 달이 됐고, 조약돌처럼 닳아 깨끗이 씻겨 밀려왔다. 힘든 해의 끝 무렵 집에 돌아왔다. 바람이 나를 빚고 바다 소금이 나를 쓰라리게 하는 곳으로. 새 출발을 하긴 했지만 새 삶을 가지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뭔가 쓸모가 있으려고 해가 나는 짧은 낮 동안 돌담을 다시 세우고 밤에는 캐러밴에서 잔다. -138쪽


야심차게 도착했던 도시에서 알콜중독을 얻고 귀향한 작가는 자연을 살피고 자신의 지리학을 탐구하며 허물어진 삶을 보수한다. 고해에 가까운 작가의 글을 읽는 동안 낟알을 줍는 기분이 되어 시간의 흐름을 잊지만 그런 소소한 하루하루의 기록이 순식간에 해를 채웠을 때 그가 중독으로부터 한 걸음 더 멀어졌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된다.


내 친구가 자기 엄마가 남편과 어린 자식 셋을 남기고 세상을 떴을 때 이야기를 해주었다. 식구들이 미국으로 여행을 갔는데, 아빠가 그저 "계속 차를 몰았다"고 했다. 더 해낼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해야 하고, 삶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안정될 때까지, 삶이 어떻게 이어질지 좀 더 뚜렷이 드러날 때까지, 무어라도 하기 위해 아빠는 계속 차를 몰았던 것이다. 나도 계속 차를 몰고 나아간다. -200쪽


무언가에 깊게 중독되었을 때는 그 중독의 대상을 떨쳐내는 것만이 아니라 그로 인해 비게 된 시간을 어떻게 메꾸어야 할지가 심각한 문제가 된다. 이 책을 통해 배운 것이지만, 그럴 때는 환경을 바꾸는 게 큰 도움이 되는 것도 같다. 같은 환경에서는 사라진 게 무엇인지 확연히 드러나지만 배경이 달라지면 '난 자리'를 식별하는 것이 조금은 더 어려울 테니까.


작가는 끝까지 솔직하다.


'술을 끊는다'는 것은 모든 게 다 좋아진 다음의 어느 순간이 아니라 계속되는 좌절과 갈등과 유혹을 겪으며 다시 만들어나가는 끝이 없고 지난한 과정이다. -395쪽


뭐... 술을 끊는 것만 그렇겠는가. 우리를 의존적으로 만들고 피폐하게 하는 모든 나쁨과 싸워 버티는 일들이 다 그렇겠지. 그저 계속하고 또 계속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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