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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가져다준 선물

김지연, 등을 쓰다듬는 사람

by 담화

책들이 줄지어 꽂힌 서가를 헤매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이런 책을 발견하는 순간 새삼 절감한다. 우연한 만남이 주는 행운이 없다면 인간은 습관처럼 익숙한 것만 찾게 마련이다. 사람이든, 음악이든, 책이든 그 무엇이든. 심지어 행복하다는 happy의 어원인 hap에는 우연히 맞닥뜨린 행운 serendipty에 가까운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

달리 말해 옛날 사람들에게 행복이란 정신적 상태의 상당 부분이 운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뜻인데 그게 옳고 그르고를 따지기 전에 그거 하나는 동의하면 어떨까 싶다. 행복이란 것이 죽어라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는 어떤 심적인 평정 같은 건 아니란 거. 좋은 일이란 우연히 찾아드는 것이며 오면 기쁘고 감사한 거지만 찾아오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죽도록 불행해야 할 이유도 없다고.


그러니까 이런 말을 줄줄이 늘어놓은 건 평소 책을 고르는 취향과 습성을 고려해 보았을 때 도서관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실물 책을 넘겨보지 않았다면 내가 이 책을 읽어봤을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깝다는 말을 하려고 그랬다...


http://aladin.kr/p/Bq6TQ


사실 도서관의 신간서가에서 이 책을 빼어든 건 출판사 이름 덕이 컸다.


1984Books라는 이 출판사가 최애 출판사 중 하나로 등극하는 데는 크리스티앙 보뱅의 공을 빼놓을 수 없는데 보뱅에 대해 뭣도 모르던 내가 홀린 듯이 그의 책을 골랐던 이유 중 하나는 기막힌 미감을 자랑하는 표지 덕이라고 하겠다. 학부생 시절 북디자인에 상당히 홀려 있던 시기가 있었던 만큼 책 표지를 기막히게 뽑는 출판사들, 그리고 편집자의 철학이 보이는 출판사들에게는 일단 무조건적인 호감을 갖는 편이다. 아무튼, 그런 출판사들의 이름을 몇 개 마음에 품고 다니다 보면 저자의 이름이 낯설어도 출판사에 대한 믿음 덕분에 일단 관심을 주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저자는 미술평론을 하시는 분이다. 전시회에 붙이는 글도 종종 쓰시는 듯하다. 평소 친분이 있는 작가라고 해도, 한 사람의 예술관과 세계를 한 편의 글로 옮기는 부담감이 적지 않을 것이다. 같은 글을 쓴다 해도 나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과, 타인의 세계를 옮겨 적는 일이 어떻게 같겠나. 그런 부담감을 선뜻 지고서도 그런 작업을 지속해 나갈 수 있는 건 그만큼 예술의 세계를 사랑하고 그 세계를 지켜나가고 있는 작가들에 대한 애정과 존중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터다.

뭔가를 너무나 아낀다는 마음이...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한다. 바깥의 시선으로 봤을 땐 도대체 저 힘든 일을 왜 굳이, 싶은 일들을 그렇게 하게 만든다. 그런 종류의 먹먹한 감동이 이 책에 있었다.


회화나 사진은 이제 낡은 장르라지만, 여전히 사람의 몸짓이 묻어 있는 작품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하나의 이미지는 앞뒤로 이어지는 시간을 횡적으로 담고, 이미지 속 분위기는 오래전부터 쌓아온 이야기를 종적으로 담는다. 가로축과 세로축이 교차하는 곳에 작가의 시선이 닿고, 붓을 휘두르거나 셔터를 누르는 몸의 흔적이 포개진다. 직전의 과거로부터 직후의 미래까지 흐르는, 한 토막이 시간이 한 장의 이미지 속에서 영원히 재생된다. -20쪽


미술작품이건, 음악이건, 그것을 감상할 때 작가의(작곡가, 연주자, 무엇이든 치환해서 넣자) 마음과 의도까지 추측해 가며 작품을 바라보고 듣는 사람은 드물겠지. 그렇다면 결국 감상자에게 즉각적인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는 건 표면에 나타난(귀에 들리는) 인지적 자극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순간에는 작품의 독해보다는 아마도 작품의 표현력이 감상자 개인에게 일으킨 어떤 감각적 인상의 그가 받은 감동의 깊이나 결을 정하게 되지 않을까 감히 추측한다. 그럴 때, 저자와 같은 전문가의 해설이 조금 더 깊은 이해의 층으로 내려가는 친절한 계단이 된다. 물론 그것을 밟고 내려가는지 마는지는 감상자의 선택이지만.


누구나 삶의 모든 시기에 고유한 빛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질서로 자기 궤도를 돈다. 다만 드넓은 우주에서 마주쳐 서로를 알아본다. 그날 엄마의 빛과 내 빛은 같은 순간을 함께하며 교차했다. 그의 늙음과 나의 젊은, 아니 어쩌면 그의 젊음과 나의 늙음도 같은 곳에 있었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함께 하는 지금, 서로의 다른 빛을 알아보는 순간이다. -130쪽


읽기가 경험이라면 글은 장소, 쓰기는 건축이다. 내가 지은 장소를 통과한 이들이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길 원한다면 그들이 경험하는 분위기를 생각해야 한다. 글의 분위기를 짓는다는 것은, 내가 아는 것을 전달하려는 욕심에 앞서 당신이 아는 것과 느끼는 감각을 알아채고 우리가 서로에게 어느 방향으로 서 있는지 확인하는 행위, 수많은 배려와 복잡한 은유가 자연스럽게 배치된 위압적이지 않은 행위다. -155쪽


솔직히 말해 전시회 도록이나 전시장 입구에 붙어 있는 해설을 읽었을 때 작품 감상의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거나 감동의 깊이가 더해졌다던가 하는 경험이 많지는 않다. 그건 아마도 이런 태도의 차이에서 비롯한 바가 크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작가와 작품에 대해서 아는 바가 너무 많아 그걸 모두 전달하고픈 욕심이 컸던 글들이 담은 정보량에서 지레 질려버렸던 건 아니었을까.


그런데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의 반응은 의외였다. 그는 내가 쓴 글을 읽고 눈물이 났다며 짧은 편지를 건넸고, 집에 오는 길에 그의 편지를 읽으며 나도 조금 울었다. 그는 눈물의 이유가 '글이 좋아서'라고 했지만, 사실은 타인에게 자기 이야기가 닿았다는 감격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모두 내가 만든 것이 누구에게도 닿지 못할까 봐 떨곤 하니까. 마음을 다해 작품을 만들고, 그 이야기를 듣고 글을 쓰고, 작품을 바라보고 글을 읽는 것, 결국 모두 이어지기 위한 일이다. 이곳에는 늘 여러 겹의 마음의 있다. -162쪽


세상에 뭔가를 내놓는 사람들은 저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일 것이다. 아는 분이 그랬다. 작가는 모두 관종이라고. 그 말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저마다 어딘가에 제 마음이 가 닿기를 소망하고 있을 것이다. 다음에 찾아갈 전시회에서는 조금 더 신경 써서 작가의 말을, 작품해설을 읽어봐야지.



아래의 문단은 사실 본문에 썼다가 너무 옆으로 새는 내용이라 뺐는데 뱀발처럼 덧붙여 본다...



책을... 속물적인 이유로 골라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아니 주장한다. 뭐면 어떤가. 심지어 표지 날개에서 발견한 저자가 예뻐서(잘생겨서) 골랐다고 해도 나쁠 거 없지 않나. 뭐가 됐든 책에 관심을 건넬 수 있는 아주 작은 여지가 있다면 좋겠다. 그래서 한 문장을 읽고, 또 다음 문장을 읽고. 도저히 더 못 읽겠어서 덮어도 괜찮지 않을까. 다만 왜 덮었는지만 잠시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너무 젠체해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본인도 모르는 것 같아서. 너무 유치해서. 그런 식으로 텍스트에 대한 인상을 만들고 감상을 만들어 나가는 경험이 제법 쌓이면 그걸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지는 순간도 올 것이고... 그럼 좋지 않을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와글와글 떠들어대는 장이 계속 쭉쭉 늘어나면 너무 좋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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