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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사라지면 안 되겠죠, 그런데

양성원, 김민형, 내일 음악이 사라진다면

by 담화

이것은 대담집이다. 대중적으로도 이름을 널리 알리신 김민형 수학자와 양성원 첼리스트가 음악과 감동의 본질, 음악의 영향력과 대중화 이슈 등에 대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하게 주고받은 대화의 기록이다.


http://aladin.kr/p/aRsz8


일단 총평.

웃었다. 엄청 많이 웃었다. 아무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해서 인터뷰집도 대담집도 많이 읽는 편인데, 이렇게 본인들의 (전공분야에서 비롯한 성향일 거라고 추측한다) 입장을 강하게 내세우면서 부딪히는 대담은 오랜만이었다. 퍼실리테이터가 없었는데도 이렇게 유연하게 대화가 흘러갔다면, 그건 두 분의 연세와 사회적 연식에서 힘입은 바가 컸으리라 확신하는 바다. 활자로 기록된, 이미 지나간 대화를 읽던 내가 조마조마한 순간이 없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답답해서 가슴을 친 부분도 없지 않았는데, 그건 내가 두 분 중 한쪽에 강하게 감정이입을 한 상태로 읽어서 그런 듯도 싶다. 어느 쪽에 이입했는지는 비밀로 남겨둘... 것까지는 없으니 소심하게 고백해 보자면 나는 주로 양성원 선생님 입장에서, 김민형 선생님을 강하게 반론하고 싶은 충동을 여러 번 느꼈다(물론 반론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반론 자체가 논거를 들어 반박해야 하는 것인데 수학자를 상대로 무슨 반론을 하겠다는 건가. 대중은 그것을 객기라고 부른다...).


하지만 한 번은 말하자. 87페이지에 참다못한 내가 연노란색 포스트잇을 붙여서 끼적여 둔 메모가 있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다.

[아니 자꾸 뭘 이렇게 동의하라고 강요하시죠 ㅋㅋ 뭐 증명하십니까, 누가 수학자 아니랄까 봐 이러십니까...]

그렇다. 책 초반부에서, 감동이란 대체 무엇인가! 좋은 음악이란 어떤 것인가, 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고자 하는 것이 김민형 선생님의 의도였다는 것은 알겠으나 애초에 그것은 합의가 불가능한 질문인 것이다. 수학적 명제가 아니에요...

질문에 대한 무수한 명제가 쏟아져 나온 것은 몹시 흥미로웠다. 그게 대담의 재미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참여 당사자들의 특수한 백그라운드와 결합하여 나오는 어떤 진술들. 그것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거나와 관계없이 그러한 명제들은 지금껏 독자가 가져보지 못한 특별한 시야를 제공하므로 가치가 있는데... 있는 것인데!


자꾸 동의하라고 하셔서, 그땐 조금 짜증이 났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하지만 김민형 선생님께는 아무 유감이 없음도, 다시 한번 강조.


양성원_감동에도 여러 층위가 있습니다. 제가 그 곡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면을 발견하게 해 주면, 그 연주자에게 존경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어요. -29쪽


아, 이제야 알겠다. 나는 이 말에 굉장히 공감했다. 감동에도 여러 층위가 있다는 말. 그러나 그것을 뭐랄까, 차곡차곡 정리해서 이런저런 것을 감동했다고 부를 수 있는 것이라는 '카테고리화'에는 강하게 반발했다는 것을.


김민형_청자로 하여금 어떤 '감정'을 일으키게 하는 '객관적' 활동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차르트는 '이렇게 작곡하면 이 지점에서 사람들이 이런 감정을 느낄 것이다'하는, 지금으로 치면 알고리즘이 있다고 보았어요.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공식 같은 것이 있다는 뜻이겠죠. 언뜻 생각하기엔 감정을 조정하는 공식이 없을 것 같지만요. -65쪽


양성원_감동받으려면 감동받을 수 있을 만큼의 경험이 충족되어 있어야 한다는 거죠. 음악적인 경험이 아니라 책을 통해서든 다른 예술을 통해서든요. -83쪽


여기에 밑줄을 백만 번쯤 긋고 싶었다(그러면 책이 찢어집니다). 감동이라는 정동에는 지적인 깊이가 관여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그런 게 없다고 해서 감동받지 않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지만. 그 공감의 영역을 어떻게 배분하느냐에 따라 대중성이 갈린다. 대중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 감정의 영역과 고유한 감동의 경계를 감지하는 것도, 좋은 감상자의 역량일 것이다.


양성원_클래식을 대중화하는 것보다 클래식을 찾는 애호가가 더 늘어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클래식을 대중화하는 과정에서 클래식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소지가 크기 때문입니다. (...) 카뮈의 작품이 대중적이지 못하다고 해서 바꾸어야 할까요? 그렇진 않죠. 카뮈의 작품은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예술적 가치입니다. -109쪽


양성원_베토벤의 현악 사중주를 들을 때는 비교적 긴 시간 한 자리에서 듣는 게 더 좋기는 합니다. 지나가는 순간에는 잘한다, 좋다, 느낄 수 있지만 베토벤의 감동을 느끼기에는 부족한 시간이고 마땅한 장소도 아닌 것 같아요.
김민형_전체적으로는 그렇겠죠. 하지만 인생의 작은 경험이 나중에 얼마나 큰 경험으로 이어질지는 모르잖아요. 순간만 들어도 사람들에게는 좋은 자극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237쪽


양성원 선생님의 말씀에 동의한다. 클래식이 대중화되는 것보다, 다소 힘들고 어렵지만 그 산을 오를 의욕을 내게끔 독려하는(혹은 매혹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차원에서 임윤찬 같은 아티스트의 등장은 정말이지 단비 같은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양성원 선생님의 말씀에 주억거리면서 읽은 나였어도, 김민형 선생님의 말씀에 한 표 던지고 싶어진 순간이 찾아왔으니 그건 바로 이 대목이었다. 모든 곡을 격식에 맞추어 듣는 것이 중요하지만, 우연히 스치듯 지나치는 작은 만남이 한 사람의 애호가를 만들 씨앗을 뿌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말에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어떤 종류의 사랑은 그저 아주 찰나의 스침만으로도 충분한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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