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리, 모든 것들의 세계
오래 걸려서 자신의 장점을 찾아내는 작가가 있고, 첫작부터 고유한 목소리와 얼굴을 갖고 창작을 해나가는 작가가 있다. 후자를 대중은 흔히 천재라고 부른다. 천재는 흔히 선망이나 질시의 대상이 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런데 질투라는 건, 적어도 뭔가 나와 유사한 조건을 갖고 있거나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하지만 나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한 번 이상 생각해 본 것이어야만...) 상대를 대상으로 일으키는 감정이라는 걸 전제해 두고 생각해 보면, 정말 잘 나가는 사람들에게는 질투라는 걸 하기가 쉽지 않다. 애초에 비교의 대상조차 못 되니까. 나보다 조금 형편이 나은 옆집 언니에게는 질투가 나도 잘 사는 연예인에게는 질투가 안 나는 그런 메커니즘으로 발동되는 법 아닌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또 이렇게 서설이 길었는가 하면,
적당히 잘 쓰는 사람에게는 질투가 날 수 있어도 너무 압도적으로 잘 쓰는 사람에게는 질투도 안 난다는 말을 하려고 그랬... 던 듯하다. 그 압도적으로 잘 쓰는 작가의, 지금 이야기하려고 하는 책은 이것이고.
나는 이 책보다 「브로콜리 펀치」로 이유리를 먼저 읽었는데, 「브로콜리 펀치」를 내게 소개해 준 친구는 자신 있게 말했었다. 너는 분명히 이 작가를 좋아할 거라고. 취향에 정말 잘 맞을 거라고. 누군가에게 확신을 갖고 책을 추천하는 일이란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인데, 그건 그 사람을 정말 속속들이 잘 안다고 자부할 만큼 그를 웬만큼 알아도 종종 빗나가는 게 책 추천이라는 일인 까닭이다. 그럼 어떤 면에서 이유리 작가가 유달리 뾰족하게 빛나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건 다른 독자들의 리뷰나 평론가들의 서평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표현인데, 능청스럽다.
무지무지하게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한다. 픽션이라고 해도 장르를 보면서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어느 정도까지의 픽션적 장치를 용납할 것인지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세우게 마련인데, 이유리 작가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소재를 슬그머니 끼워 넣으면서 "내 친구의 친구가 자기가 봤다고 그랬는데," 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그러니까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들이 멋대로 영혼결혼식을 시켜 버려서 별안간 부부 관계가 되었음을, 과로에 시달리는 공무원- 저승차사 -에게 고지받고 황당해하는 여자 귀신이 등장하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고, 상대의 마음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을 수 있는 기묘한 자연발생품(도무지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적당히 붙였다) '마음소라'도, 대대로 가문에서 물려준 요정이 존재하는 것도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건 작가로서는 정말 대단한 재능인데 그건 대부분의 스토리텔러들은 뭔가 상식적이지 않은 존재를 이야기 속에 끌어들이는 순간 그 존재 혹은 아이템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거나 독자를 논리적으로 설득해야 한다는 충동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여긴 원래 이런 세계야. 그렇게 스리슬쩍 자연스레 배경에 녹여가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건 깜짝 놀랄 정도로 어렵다. 문턱이 느껴지지 않는달까. 그러면 읽는 사람으로서도 걸림 없이 그 가상의 세계 속으로 순식간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그건 정말이지 이유리의 대단한 솜씨고 기술이다. 연습한 적 없다면, 진짜 재능의 영역인 거고.
개인적으로는 이 책보다 이유리의 천연덕스러움이 한층 더 빛나는 건 「브로콜리 펀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야기꾼으로서 쭉쭉 성장하는 이유리의 키재기표를 보는 것 같은 그런 뿌듯한(내가 왜 뿌듯한지는 알 수 없다) 기분을 느낄 수 있어서 즐거웠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 역시 이런 얼굴로 울음을 터뜨렸었다. 오만 군데 폐만 끼치고 살아왔으니 아무런 미련도 후회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를 여기 잡아두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고 나니 그게 너무나 소중해졌고 그리워졌으나 이제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이 이미 죽은 몸으로도 다시 한번 죽고 싶을 만큼 슬펐으니까. 두고 온 모든 것이 갑자기 미치도록 고맙고 미안해서 마음이 미어질 것만 같았으니까. -26쪽
나는 마음소라를 도일의 머리통이라도 되는 듯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문득,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따뜻한 것을 부어준 듯 가슴이 묵직하고 발이 저절로 동동 굴러질 만큼 기분이 좋았다. 그때까지는 잘 알지도 못했던 사람이긴 하지만, 누군가가 내게 마음소라를 선물할 만큼 순수한 열정과 애정을 쏟아붓고 있다는 건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마치 내가 중요한 사람, 가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으쓱한 기분. -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