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좀 안 물어보시면 안 돼요?
장담컨대 책 좀 사는 분들 중에서 이 질문 받아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과장 좀 해서 귀에 피가 나도록 듣는다.
"근데 그렇게 산 책은 다 읽으세요?"
"뭐, 일단 사둔 것 중에서 골라서 보는 거라서요."
(...책을 한 권 사주면서 물어보면 더 친절한 대답을 들을 수 있다고 말하려다 만다) 집에 사람들 초대해서 차 한잔 대접하고 때론 종종 식사도 대접하는 게 나름의 취미였던 때도 있었는데 이젠 절대 안 한다. 일단 저 질문받는 게 너무 피로도가 크다. 질문 하나로 끝나면 괜찮다. 다 읽지도 못할 거 왜 사요?(언젠가 보려고요) 읽은 책 내용 전부 기억해요?(그럴 리가 없죠) 어, 기억도 못 할 거는 왜 읽는 건데요?(못 믿으시겠지만 그게 나름 소화돼서 어딘가에 다 남아요) 도서관 가도 되잖아요?(제가 책 사달라고 한 적 없잖아요 저한테 왜 그러시는데요) 누가 알아봐 주는 것도 아닌데 왜 읽어요?(재밌어서 읽는 거지 인정욕구 때문에 읽는 거 아닌데요) 다른 거 재밌는 것도 많아요. 제가 좀 추천해 줄까요?(괜찮습니다 저도 나름 영상 볼 건 챙겨보고 OTT도 구독합니다...)
그러면 비슷한 취미를 가진 친구만 부르면 되지 않느냐, 싶은데 이것이 또 미묘하다. 책친구를 집으로 불렀을 때 그들의 시선이 천천히 여기저기에 포진한 책꽂이를 스캔하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의 기분은 정말이지 애매함 그 자체. 그들은 그저 책 제목을 훑어보기만 하는 게 아니다. 책 읽기를 퍽 즐기는 사람들은 책등의 제목을 훑어보는 순간순간 머릿속에서 나름의 '취향 지도'를 그리기 시작하는데 이건 정말이지 바깥에서는 잘 드러내지 않던 내 속내가 탈탈 털리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 드는 일이다. 유난히 한 곳에 시선을 오래 붙박고 있던 네가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아니 알 것 같긴 하지만 그거 아니야. 아니라고!라고 말하고 싶었던 때가 꽤 종종 있었다... 그런 당혹스러운 경험을 몇 번 한 이후에는 가급적 최대한 장서를 공개하지 않는 쪽으로 선회하려 했으나 세상일은 원래 마음먹은 방향의 반대로 흐르게 되어있는 법.
포기하면 편해요.
그렇다, 나는 그냥 다 놓아버리기로 했다. 아니 무엇보다도, 사람이 양심이란 게 있지 않나. 나 역시도 다른 책친구의 집에 가면 그 집 책꽂이를 세심하게 조사하고 싶은 욕구를 어찌할 도리가 없는데. 그건 그냥 절제가 안 되는 본능 같은 것인데!
요즘이야 덜 해도, 내가 어릴 때는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어느 집에나 거대한 책장이 있었다. 그곳에 기거하는 책들의 면면을 살피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이 없었다. 10대 때에는 그 재미가 특히 더 각별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 시절을 지나온 분들이라면 모두 알만한 이유 때문이리라. 하기야 꼭 나이에 관계없이, 바깥에서만 만나던 분들의 책장을 들여다봤을 때 의외의 취향, 뜻밖의 관심사에 그를 다시 보게 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 그런 것 같다. 어떤 부분에서, 자신을 완벽하게 감추는 것이 불가능한 영역이 있는 듯하다. 내 경우엔 그것이 책이고, 또 어떤 사람들의 경우엔 식생활이 그렇겠지.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아도 나의 책 취향이 드러나는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된 순간이 있었다. 아마도 상당히 마이너한 라이트노벨 작품(이 작품이 마이너했다는 게 아니다. 당시 라노벨은 극극마이너 장르에 속했다)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때가 아닐까 짐작하긴 하지만. 어쨌건 그렇게 다 내려놓고 보니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별로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때부터 나는 누가 볼지도 알 수 없는 인터넷 세상에서도 내가 좋아했던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어렵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다만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책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조심스러운데, 나한테는 별로였어도 그걸 마음에 들어 했을 사람이 분명히 존재할 거라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고, 그 한 권을 세상에 내어놓기 위해 수많은 낮밤과 인생을 갈아 넣었을 저자와 편집자의 노고를 너무... 너무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근데 무슨 이야기를 하려다가 이렇게 근본 없는 잡문을 쓰게 된 거지...? 어쨌든 월요일은 잡담만 하기로 한 날이니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그러니까 이것이 남들 앞에서 내가 좋아하는 책 이야기를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었던 계기가 됐던 바로 그 책인데...
맙소사 내용이 기억이 제대로 안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