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外, 음악소설집
최근 4-5년 전쯤부터 서점가에서 앤솔로지 anthology 소설집을 찾아보기가 퍽 쉬워졌다. 소재 위주로 발간된 앤솔로지가 흔하지만 때로는 트렌디하고 기발한 발상으로 나온 앤솔로지도 적지 않다(예를 들면 MBTI 소설집이라든가(이건 정말 신간목록에서 발견하자마자 폭소했던 기억이..), 또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재해석 앤솔로지 같은 작품들). 그런 반면 이렇게 정직하고 직설적인 제목을 단 앤솔로지도 있다.
매일 아침마다 신간을 훑어보는 습관이 있는데 작년 초여름쯤, 이 책을 발견하고 따로 메모해 두기까지 했었다. 실물을 확인하고 싶었다. 조그만 스마트폰 화면 너머로만 보이는 썸네일만 봐도 이 책의 만듦새가 범상치 않았다. 책이 어쩌면 이렇게 예쁘지. 뽀얀 안개빛 벨륨 커버 아래로 보이는 은은한 식물 모티브의 그래픽도 그렇고, 단아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타이포그래피 디자인까지. 그저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한 권의 책에 홀딱 반해본 건 진짜 오랜만이었다. 디자인적으로 여러 결을 중첩해 둔 것과 달리 조금의 오해나 착각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간결한 「음악소설집」이라는 제목과, 어울려도 이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앤솔로지에는 앤솔로지만의 맛이 있는데, 대략 이런 것들이다. 편집팀(내지는 출판사)에서 제안했을 컨셉 아래 작가들이 각자의 스타일과 문체로, 주어진 소재(주제)를 유니크하게 해석해 새롭게 엮어낸 이야기들이 나란히 펼쳐진다. 같은 A라는 사물 혹은 대상이, 누군가에게는 잊히지 않는 추억이 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절대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를 여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에게 꼭 건네주고 싶은, 그런 애틋한 것이 될 수도 있고 이미 멀어졌다 생각한 사람과 사람을 다시 잇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이 기획에 초대된 작가들이 창조한 세계 속에서 그 소재를 어떤 의미로 빚어내고 위치시키느냐에 따라 의미는 계속 변한다. 어느 방향에서 빛을 비춰주는지에 따라 다른 색을 보여주는 보석처럼. 같은 소재(테마)를 다른 시각, 낯선 스타일을 통해 바라볼 수 있다. 평소라면 찾아 읽지 않았을 작가의 짧은 이야기를 통해 그에게 호감을 품을 수도 있다. 자신만의 최애작가 풀을 넓히는 기회가 되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고. 뭐, 그런 게 앤솔로지의 재미이자 효능이 아닐까.
이 작품집엔 특정한 곡을 테마로 삼은 소설도 있고, 좀 더 넓은 의미에서의 음악을 소재로 지은 이야기도 있다. 아주 사소한 찰나의 마음의 찌르르한 움직임을 붙잡은 글도, 비록 내가 경험한 바 없어도 코끝이 찡해지도록 음악이 녹아들어 있는 소소한 일상의 모습들을 반추하게 하는 이야기도 있다. 말한 것처럼, 전혀 몰랐으나 이 소설집을 통해 새로 알게 된 작가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소설집의 말미에 여기에 참여한 작가들의 인터뷰에서 공통질문으로 제시되었던
[청탁 연락을 받고 가장 먼저 떠오른 음악이 있으셨나요. 소설을 쓰는 동안 처음의 음악이 유지되었는지, 또는 바뀌었는지도 궁금합니다]
라는 질문에 대한 각 작가님들의 답변이 몹시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그분들의 작업 스타일과 작업에 임하는 첫 시작을 엿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날, 통화가 끝난 뒤에도 병실 복도에 한참 서 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제 나는 헌수도 없고, 엄마도 없고, ‘다음 단계‘를 꿈꾸던 젊은 나도 없는 이 방에서 ‘너한테 배웠어, 정말 많이, 정말 많이 배웠어 ‘란 가사의 노래를 듣는다. 보다 정확히는 네가 아닌 너의 부재로부터 무언가 배웠다고. 그런데 여전히 그게 뭔지 모르겠어서 지금은 그저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내 쪽에서 먼저 원곡 위에 ‘안녕‘이란 한국어를 덧씌워 부른다고. 우리 삶에는 그렇게 틀린 방식으로 맞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고 아마 나는 그걸 네게서 배운 것 같다고. -45쪽
내게 음악에 얽힌 이야기에 대해 묻는다면, 글쎄. 역시 나는 나의 20대 전반부를 모두 쏟아부었던 동아리와 열 번이 조금 넘는 연주회들에 대한 것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다. 혹은 30대가 되어 다시 치게 되었던 피아노라든가, 역시 20대 때 오며 가며 들르던 압구정동 ***레코드에서 조용히 헤드폰을 쓰고 신보를 듣던 기억들, 용돈이 모일 때마다 하나하나 사 모았던 음반들도. 음악은 듣는 것이었던 동시에 내 손과 귀로 하는 것이었다. 그 시절이 있었기에 나는 조금 더 공감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