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났을 때 저질러보는 거야!
“와, 완전 대낮 됐다 야.”
목적지에 도착해서 역을 벗어나자마자 서울을 떠날 때와는 달리 환히 밝은 하늘을 보며 민서가 입을 떡 벌렸다. 들뜬 목소리로 시윤이 거들었다.
“일곱 시야, 일곱 시. 해 뜨고도 남았어.”
또래 친구들끼리 떠나온 첫 여행이었다. 별 대단한 계획이 없어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해야 할 것만 같은 흥분으로 마음이 부풀었다. 다만 들뜬 기분만큼 마음 한구석에서 미약한 불안감도 함께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본드 경 Sir Bond이라는 이름이 있다던 곰인형을 한 팔에 비장하게 껴안은 민서가 제일 왼쪽에, 시윤이 가장 오른쪽에 섰다. 가운데에 끼어 있던 해랑이 짐짓 비장하게 손을 내밀어 친구들의 손을 붙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가보자고!”
“으아아아…근데 버스 내려서 좀 걸어가야 돼, 귀찮네.”
“세상에서 젤 번거로운 짓인 여행까지 무릅쓴 처지에 까짓 거.”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주변을 흘긋거리던 시윤이 조그맣게 속닥거렸다.
“다 여행객 같다.”
“그렇지 뭐. 이 시간에 기차역 앞에서 굳이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들 중에 진짜 여기 주민이 얼마나 되겠어?”
해랑이 시니컬하게 중얼거리는 순간 뭔가 말랑한 것이 해랑의 뺨을 꾹 눌렀다. 몽글몽글한 털북숭이 곰발바닥이 제 볼에 맞닿은 것을 본 해랑이 어이가 없어 눈을 치켜뜨자 민서가 근엄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시크앤시니컬 모드 가동 금지. 본드 경의 엄준한 경고 드롭킥을 겸허히 받아들이도록.”
“경, 그런 건 드롭킥이 아니라 털뭉치 슬라이딩이라고 하는 거예요.”
민서와 해랑이 역할 연기를 하며 노닥거리는 소리를 들은 듯, 정류장에 옹기종기 모여 서 있던 여행객들이 고개를 모로 돌리며 웃음을 참는 듯했다. 전혀 개의치 않는 둘에 비해 시윤만 귀밑이 빨갛게 익었다. 멀리서 버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버스가 목적지 근방에 셋을 떨구어주고 떠났다. 방학식날 패기 좋게 수험생 되기 전 마지막 여유를 부리고 오자며 의기투합해서 당일치기 여행을 계획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늘 가족끼리 함께 다니다 처음으로 저희끼리 멀리 나와 본 아이들은 말을 아끼고는 있었지만 속으로 조금 움츠러든 상태였다.
“야, 길찾기 켜봐.”
“... 그냥 착 보고 알아서 찾아간다는 선택지는 없는 거?”
“아는 척하다가 이상한데 들어가서 헤매는 것보다야 차라리 초짜 티 내면서 착실하게 지도 보고 찾아가는 게 낫지, 안 그러냐?”
시윤과 민서가 투닥거리는 사이로 들은 척도 않고 여전히 가운데자리를 차지한 채 앞만 뚫어져라 보고 있던 해랑이 혼자 고개를 까닥거리며 반보 앞으로 나섰다.
“이쪽으로 가면 되겠다.”
“너 길 알아?”
“알 것 같아.”
기차역 앞에서 맞았던 바람과 완연히 다른 바람이 아이들을 반겼다. 성큼 앞장선 해랑의 뒤를 쫄래쫄래 따르던 민서가 어느새 길찾기 앱을 켰는지 오오, 소리를 내며 작게 환호했다.
“윤해랑 인간 네비였네?”
민서가 뒤에서 뭐라거나 말거나 해랑은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왠지 점점 신이 났다. 스스로 뭔가가 하고 싶어서 그 마음을 꺼내 표현해 본 것이 엄청나게 오래전에 일어난 일 같았다. 3학년을 맞이하기 전에 동갑내기 친구들끼리 한껏 멀리까지 갔다 와 보자고 함께 의견을 모았던 것도 엄청나게 옛일 같기만 했다. 막상 기차표를 예약하고 출발일이 다가올수록 괜한 짓을 했나 싶은 후회가 몰려오며 감당 못 할 일을 벌인 것 같아 무섭기도 했는데 약간의 걱정을 내비친 엄마 앞에서 패기만만하게 다른 애들은 더 멀리까지 갔다 오는 애들도 있거든? 하면서 과보호하지 말라는 투로 거세게 반항했던 전적이 있는지라, 생각해 보니까 역시 엄마 말이 맞는 것 같아, 하고 꼬리를 내리기도 싫었다.
엉켜버린 실뭉텅이 같았던 기분은 뜻밖에도 낯선 촉감의 바람이 얼굴과 목덜미를 툭툭 건드리고 가는 동안 거짓말처럼 스르르 풀려버렸다. 멀지 않은 곳에 나타난 하얀 다리를 가리키며 해랑이 씩 웃었다.
“veni vidi inveni.”
“뭔 소리야.”
“윤해랑 님 어록에 새로 등재된 말씀이다 왜.”
사실 문법적으로 맞는지도 모르겠고 말이 되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극소한 확률로 제가 지금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그대로 담긴 말이 될지도 모른다고 해랑은 믿고 싶었다. 도저히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은 어떤 기분이 잇달아 몰려오는 파도 소리처럼 철썩, 하고 밀려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혀 기억엔 남아있지 않지만, 아마도 간신히 중력을 이기고 처음 의자를 붙잡고 일어섰을 때라거나, 1미터 앞에서 손을 앞으로 내뻗은 엄마를 보며 비틀비틀 첫걸음을 떼었을 때의 자신은 아마 이런 기분을 이미 맛봤던 게 아닐까. 어떤 일들 때문에 힘들고 주저앉고 싶을 때 꺼내보고 싶은 기억. 엄마도 아빠도, 심지어 오빠의 도움도 없이 친구들과 나란히 바다를 찾아오는 데 성공한 지금 이 순간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만 같았다.
“야, 윤해랑! 이거 봤어? 여기 길 이름 너랑 너네 오빠 이름 딴 거 같은데?”
[표제어_호기롭다/모티브_이수지「파도야 놀자」]
BGM_Midsommarvaka_Theme form "Swedish Rhapsody", 「Scandinavian Moods」Michala Petri
실질적으로 지난 금요일부터 오늘 오전까지 이어진 연휴(=특수노동절)였던지라 브런치에도 글 쓰러 정말 오랜만에 들어와보는 느낌이군요(눈물 좀...)... 임시공휴일, 대체공휴일... 할 말 많지만 하지 않겠ㄷ...(하다보면 멱살 잡고 싶어질 사람이 많아질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