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자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걸 어떡하라고
"어, 정말이다."
눈을 동그랗게 뜬 시윤이 민서가 가리킨 표지판을 보며 중얼거렸다. 해랑은 그곳에 쓰여있는 길이름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민서의 말대로였다. 남매의 이름을 섞어놓은 이름이 붙은 길이었다.
"해파랑길. 와, 어쩐지 바다 냄새가 나는 이름이라고 생각하긴 했었는데 진짜네."
"그런 의도로 지은 이름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냥 그렇다고 쳐, 좋은데 뭐."
해랑은 별다른 대답 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어느 쪽의 이름이 먼저였을지가 잠깐 궁금하긴 했다. 하지만 제 이름이 바다를 연상시켰다는 민서의 말이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다. 나중에 집에 가서 이름 어떻게 지은 거냐고 엄마한테 물어봐야지, 해랑은 생각했다. 진짜 바다를 생각하면서, 바다의 파란 빛깔이 떠올라서 지은 이름이었을까. 오빠 이름은 분명히 그런 것 같은데, 내 이름은 아닌 것도 같고.
평소 뭔가를 결정할 때 크게 고민하는 법이 없이 시원시원한 엄마를 떠올리다 보니 갑자기 해랑은 생각이 많아졌다. 제 이름을 지어줄 때도 그렇게 길게 고민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면 그건 또 어쩐지 서운하고, 그렇다고 유별스럽게 그때만 오래오래 고민했을 거라고 생각하면 그건 또 어쩐지 해랑이 아는 엄마답지 않다 싶어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니 그런데 우리 이름을 엄마가 지었을 거라는 보장이 어디 있어. 아빠가 지었을 수도 있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지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작명가가 지었을지도 모르는데. 보통 때는 별생각도 없었던 사소한 일 하나에도 묻혀있을 수많은 가능성과 그대로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후보들을 생각하니 갑자기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만약 내가 윤해랑이 되지 않고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으면. 그러고 보니 곰인형에 붙여주었던 사랑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 엄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었던 적이 있었던 것도 기억났다. 어쩌면 윤사랑은 곰돌이가 아니라 내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름이 다르면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걸까. 살아가는 방식도, 어쩌면 미래도 달라지는 걸까. 한 사람이 불리는 형식이란 게 그 이름의 소유주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라는 건 얼마나 큰 걸까. 혹은 얼마나 보잘것없는 걸까. 오만가지 잡념에 사로잡힌 탓에 해랑의 발걸음은 느려지기 시작했다.
다리를 발견하자마자 의욕이 갑자기 넘쳤는지 와다닥 달려 올라가는 친구들의 발아래로 파도가 넘실거렸다. 남들이 쳐다보거나 말거나 꺅 소리를 지르며 다리 난간을 붙잡고 펄쩍펄쩍 뛰는 민서와 시윤은 눈앞의 바다에만 오롯이 집중하고 있었다. 터덜터덜 다가오는 해랑을 어이없이 쳐다보던 민서가 눈을 새치름하게 뜨며 물었다.
"뭐 해, 여기까진 씩씩하게 잘 오더니 목적지 다 와서 에너지 떨어졌어?"
"배고파, 해랑?"
"대답할 기운도 없나 봐. 쟤 입에 뭐 하나 물려줘라."
민서의 말에 시윤이 키득거리며 가방 앞주머니를 뒤졌다. 생각을 멈추고 싶었는데 잘 되지 않았다. 해랑은 단백질바의 껍질을 벗겨 내미는 시윤을 잠시간 보다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았다.
"이 길 이름이 먼저 지어졌을까, 내 이름이 먼저 지어졌을까?"
나름 고심해서, 이상하게 들리지 않길 바라며 다듬은 말이었는데 친구들은 완전히 다른 뜻으로 알아들은 듯 폭소를 터뜨렸다. 민서가 말했다.
"갑자기 왜 그렇게 혼이 나갔나 했더니 그거 고민하느라 그랬어?"
"순서 뺏긴 거 억울하면 나중에 새로 지어서 개명해. 우리나라에 딱 하나밖에 없을 것 같은 이름으로. 근데 그런 게 있을까 몰라, 쓰는 한자 다 거기서 거기고 그래봤자 나오는 경우의 수가......"
"여기까지 와서 그런 얘기하지 마, 제발!"
"야, 어차피 지금 여기서 겨울바다 보고 있는 윤해랑은 딱 하나야. 대한민국에 윤해랑이 수도 없이 많겠지만 딱 이 좌표에 있는 건 2007년 서울에서 태어난 윤해랑이거든?"
"그건 그런데..."
해랑은 입에 단백질바를 문 채 난간 아래로 시선을 떨궜다. 해변을 향해 달려간 파도가 거세게 내리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금세 뒤를 쫓아간 다른 파도가 앞서 해변을 흐트러뜨린 파도의 흔적을 지워버리듯 달려들었다. 멀리서 보기엔 다 거기서 거기인 파도여도 같은 파도가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던 해랑의 표정이 문득 조금 밝아졌다.
[표제어_ 골똘하다/모티브_리디아 데이비스「형식과 영향력」]
BGM_Ravel , 「Jeux D'eau」
모티브가 된 장소는 강릉 남항진의 솔바람 다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