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심장이 뛰고 마음은 붕붕 떠오르고
창밖이 희붐했다. 철이 나고 이런 시각에 집을 나선 기억이 별로 없었다. 그것도 친구들끼리 어딜 가겠다고 동도 트기 전부터 일어나 분주했던 적은 더더욱 없었다. 어쩐지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괜한 감상에 젖어 멍하니 바깥을 내다보던 해랑은 이내 어제 꾸려둔 가방을 휙하니 낚아채고 방을 나섰다.
"지금 나가게?"
부엌에서 바쁘게 왔다 갔다 하던 엄마가 인기척을 눈치채고 고개를 내밀었다. 해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잘 다녀올게요, 박여사님."
"내가 보내준다고는 했지만 미성년자들끼리 기차 타고 타 지역까지 다녀오게 냅두는 게 잘하는 짓인지는 모르겠다."
젖은 손을 닦으며 나온 엄마의 눈썹이 찌푸려져 있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해랑은 그것이 못마땅해서가 아니라 염려스러워서 나온 표정임을 금세 알아보았다.
"누가 들으면 며칠씩 자고 오는 줄 알겠어, 엄마. 늦긴 해도 오늘 밤에는 들어오거든요?"
"네가 엄마 되어봐라, 기집애야."
"어디서 봤는데, 한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보다 흔들리는 별빛이 더 많은 가능성을 비출 때가 있대."
엉뚱한 소리에 눈을 둥그렇게 뜨느라 찌푸림이 옅어졌다. 해랑은 피식 웃으며 손을 뻗어 엄마의 미간 사이를 가볍게 매만졌다. 오빠가 공항에서 보안검색대를 넘어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배웅하고 있었을 때에도 엄마의 얼굴이 딱 이랬었는데, 하는 기억이 뒤늦게 떠올랐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얘는."
"자기 확신보다는 자기 의심이 낫다는 소리지. 세상에서 힘 있는 사람의 자기 확신만큼 무서운 게 없어요. 그럼 갔다 올게!"
해랑의 손이 떠난 엄마의 미간은 금세 또 주름이 잡혔지만 이번에는 해랑이 남긴 엉뚱한 소리를 해석하느라 그런 게 틀림없었다. 해랑은 웃음을 삼키며 여전히 어둡고 차가운 겨울의 새벽바람 속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학교 갈 때도, 학원 갈 때도 늘 지나다니는 길인데 노면이 운동화 바닥을 힘 있게 밀어 올리는 느낌이었다.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리드미컬해지고 속도가 붙었다. 어딜 가든 매일 이런 기분으로 거리를 걸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일상이 퍽 생기 있어질 것 같았다. 곧 다가올 일을 기대하며 통통 뛰어오르는 마음을 살살 달래는 것도, 아주 어릴 때 말고는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지하철역으로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거리는 어둑하고 한산해서 확실히 새벽이라는 실감이 났는데 지하철에 몸을 싣는 순간 그 감각은 흔들리기 시작해서 여행객들로 북적이는 대합실에 들어선 찰나 완전히 사라졌다. 한낮처럼 버글거리는 인파에, 활기찬 소음이 가득해서 해랑은 잠시나마 자신이 시간을 휙 건너뛴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했다.
"윤해랑, 여기!"
굳이 이 높이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길이가 짧은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친구들이 팔을 휘저으며 해랑을 부르고 있었다.
"내가 늦었어?"
"아니 아니. 딱 맞아. 타는 곳 5번이래. 지금 내려가면 될 듯?"
"가자, 그럼."
한두 번 타본 KTX인 것도 아니었다.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명절 때마다 큰댁에 가느라고 꼬박꼬박 탈 일이 있었던 기차인데 친구들끼리 간다는 이유 하나로 모든 게 다른 느낌이었다.
"기차 처음 타냐, 뭘 그렇게 두리번두리번해."
승강장 번호를 확인하느라 좌우를 훑어보던 해랑이 민서의 말에 고개를 옆으로 휙 돌렸다. 뭔가 폭닥하고 복슬복슬한 것이 눈앞을 가리는 통에 깜짝 놀란 해랑은 뒷걸음질을 치며 시야를 가린 게 뭔지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모았다. 민서가 들이댄 물건의 정체를 깨달은 해랑의 입이 황당한 듯 벌어졌다.
"곰인형?"
"어. 실물 처음 보지? 인사해라."
해랑은 친구들끼리 가는 당일치기 여행에 민서가 커다란 곰인형을 들고 왔다는 사실에 놀라는 한편, 민서의 SNS 팔로워들이 어지간히 저 곰인형을 좋아했던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해랑이 진짜 놀란 건, 시윤이 샐샐 웃으며 덧붙인 말 때문이었다.
"쟤 이름이 뭔지 알아? 무려 본드 경이야."
"뭐?"
"본드 경. Sir Bond."
"...... 제임스 본드?"
"겠냐고."
흔들리는 눈을 한 채 멍하게 되묻는 해랑을 향해 민서가 웃음을 터뜨리더니 은밀하게 속삭였다.
"궁금하지? 궁금하면 오백 원."
[표제어_설레다/모티브_마이클 본드「패딩턴 베어」]
BGM_Stepping on the Rainy Street by The Daydre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