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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한다는 건 살아있다는 것

구병모, 바늘과 가죽의 시

by 담화

독일의 구전동화 중에 이런 것이 있다. 가난한 구두장이가 일에 지쳐 잠든 사이에 몰래 그의 공방을 찾아온 요정들이 밤새 멋진 구두를 만들어 놓고 간 덕분에 구두장이는 점차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이것이 요정들의 덕분임을 알게 된 구두장이는 보은하고자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소박하게 마련해 놓았다. 요정들은 기뻐하며 그것을 입고 먹은 뒤로 다시는 그곳을 찾지 않았지만, 구두장이의 공방은 번창하여 그는 잘 먹고 잘 살았다던가.


이 설화를 모티프로 삼아 엮은 멋진 소설을 발견했다. 구병모 작가의 작품은 이것이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의 만남인데, 지금까지 중 가장 좋았다.


고운 백사장 위를 걷다 간간이 하얗게 튕겨 오르는 조각난 햇빛 덕택에 잠깐씩 눈을 감았다 뜬 순간 서늘하게 발목을 휘감았던 파도가 물러나면, 살짝 발밑이 꺼지는 바람에 휘청거릴 때의 뻔한 아찔함이란 게 있다. 누구도 내게 그것을 단단한 바닥이라 믿으라 말한 적 없어도 으레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고 있다가 흠칫 놀라게 되는, 그렇지만 크게 위험할 것도 없고 그저 가벼운 놀람과 웃음 정도로 지나가는 정도의 기분.

종교적 믿음도, 정치적 사상도 인생의 가치관도 무엇 하나 나와 같을 리 없어도 큰 틀에서는 나와 엇비슷한, 생물학적으로는 아마도 같은 종일 존재들로 이루어진 이 세계가 '이토록 단순한 분자의 배열과 결합에 불과하다는 사실(p.44)'을 깨닫는 순간, 이렇게 말하는 것도 (억지스러울지언정)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세상엔 우리와 닮았지만 우리와 다른 존재가, 우리가 보지 못하지만 엄존하는 존재가 있지 않겠느냐고. 그건 잠깐 발밑이 꿀렁 움직이는 것과 퍽 닮은 기분을 일깨우는 종류의 발상이다. 그렇지 않나…?


생명도 결국 단순한 분자의 배열과 결합이지만, 그 조합과 구조가 달라지면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탄생할 가능성은 충분하지 않나. 다이아몬드와 흑연이 전혀 다른 것처럼, 본질의 본질은 같아도 인간이 아는 생명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영위하는 생명체가 없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이 이야기는 이런 가정과, 귀여운 설화와 어쩌면, 하는 상상력이 결합하여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물건과 음식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인간을 닮아가다, 마침내 인간의 형태를 입어버린 비인간 존재가 우리 곁에서 살아가고 있으면 어떨 것 같으냐고.


그때 문득 미아는, 구태의연한 행동이지만 제 눈을 믿지 못해 두어 번 비비고 전면을 응시한다. 밤공기 속에서 그의 발이 닿은 자리마다 음표가 만개하며, 그 위에 올라탄 작은 존재들이 보인다. 미아가 오랫동안 못 보아 어느새 잊었던 미립자에 가까운 존재들, 포화에 사그라지고 환한 전깃불에 스며들거나 문명의 소음에 부서졌으리라 짐작하며 기억의 갈피에 접어두었던 이들이 새삼 나타나서는 탄금하듯 음표 위를 뛰어다니며 스타카토의 일부가 된다. -77쪽


동화로만 알고 있던 그 짧은 이야기 속에 등장하던 요정과 같은 존재가 마침내 인간의 외피를 입고 인간 사회에 섞여 살아가느라 인간들은 고민조차 해보지 않았을 일들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소설의 중반쯤에 이르러 우리는 깨닫는다. 그들의 고민은 결국 언젠가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우리라고 해서 해보지 않은 고민인 것이 아님을.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나면 누구도 만나지 않은 것과 같다. 너무 많은 인연을 마주치면 그 누구와도 매듭을 맺지 못한다. 방대한 기억이 축적되면 피치 못하게 변형이 생기고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한다...... 않는다, 에 가까울 것이다. 언젠가는 부서지게 마련이라면 처음부터 의미를 두지 않음으로써, 내구력을 가늠할 수 없는 이 삶과 타협하고 감정적 휴전을 맞이한다. 안이 보통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마음은, 사람이 하루살이나 매미를 보는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104쪽


죽지도 못해 억지로 삶을 이어가는 반요정 반인간도 마찬가지로 끝없는 고뇌를 떠안고 산다. 영원히 해결하지 지 못할 권태를 안고 사는 것이 그들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苦를 품고 사는 게 팔자려니 생각하면 조금쯤 마음이 편해질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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