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소설가를 사랑하게 되면

마셜 브루스 젠트리 外, 레이먼드 카버의 말

by 담화

레이먼드 카버를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그의 소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A Small Good Thing>은 많이 알려진 이야기일 것이다. 생일 케이크를 주문하고서도 찾아가지 않는 부부를 비난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던 빵집 주인이 뜻밖에도 생일 파티의 주인공이 되었어야 할 어린 소년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부부에게 한 어떤 일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 이 단편소설은「대성당」에 실려 있다.

이 소설로 레이먼드 카버에게 관심을 갖고 그의 다른 작품을 접했다가 급격한 온도차에 실망을 겪었다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봤다. 실망까지는 안 했지만, 이 소설과 표제작 <대성당>을 읽고 마음이 크게 움직이는 경험을 했던 터라 음, 앞선 작품들과는 결이 많이 다른데 하고 궁금증만 품고 있었던 것을 이 인터뷰 모음집을 읽으면서 내가 왜 그런 인상을 받았는지, 그게 근거 없는 생각이 아니었던 이유를 상당 부분 알게 되었다.


http://aladin.kr/p/SR0aM


미국 문학계에서 단편소설의 위상은 레이먼드 카버가 크게 뒤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 같다. 그만큼 그가 달성한 위업은 별 것 아닌 게 아니다. 카버를 좋아하는 독자들이 그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한 번쯤 묻고 다니고 싶었던 적이 있는데, 내 또래 중에서는 (짐작컨대)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서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에 입문한 사람도 꽤 있지 않을까 싶다. 나 또한 그랬고.


하루키의 소설을 탐독하다 못해 마침내 그의 에세이에까지 눈을 돌리다 보면 빈번하게 카버의 이름을 마주치게 되는데(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도대체 이 사람이 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무라카미 하루키 정도 되는(그의 문학계에서의 어떤 위상보다도, 뭐랄까 타인에 대해서는 본인과 가까운 사람이 (ex. 안자이 미즈마루) 아니고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달까) 사람이 이렇게 호의를 내비치는 걸까 궁금했던 것 같다. 어디서 보았더라, 하루키가 마침내 레이먼드 카버를 만나고 와서 쓴 글에서는 그를 거듭 칭찬하는 말만 가득해서 굉장히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까지 좋은 말만 한다고? 적어도 내가 읽어온 바로 하루키는 그러다 갑자기 뼈 때리는 소리를 가끔 섞었는데 말이다. 여하간 나는 하루키 덕분에 단편소설의 거장 카버는 '거구에다 수줍음을 타는 남자'로 기억하게 되었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그런데 하루키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터뷰어들이 그에 대한 인상을 언급하는 말 중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저 두 수식어(체구가 크다+무척 내성적이다)에 하나가 더 있는데, 그건 바로 '나쁜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레이먼드 카버는 내향인이며 덩치가 몹시 크고, 게다가 선량하기 짝이 없는 사람인 것이다! 게다가 위선적인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아무리 이리 쑤시고 저리 쑤셔봐도 그의 입에서,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동료 작가에 대한 험담을 끄집어내는 건 가능하지 않았다. -10쪽


이렇게 완벽하게 착해 보이는 레이먼드 카버는 무려 열아홉 살의 나이에 첫아이를 가진 가장이 되는데(흡...), 처자식을 건사하기 위해서 그는 빈곤층의 젊은 남자가 전전할 수 있는 극한직업이란 극한직업을 전전한다. 게다가 그는 오랫동안 알코올 의존증으로 고생하게 되는데, 후술하듯 그 모든 힘겨운 세월이 후에 카버가 그토록 진솔하고 건조하게 바닥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써내는 바탕이 된다.


다른 인생들에서는 사람들이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필요한 크고 작은 것들을 아무리 원하고, 그걸 이루기 위해 애를 써도 성공을 거두지 못해요. 그리고 물론, 이런 인생들이 써야 할 가치가 있는 인생들이죠.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인생이요. 제가 해온 대부분의 경험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이 성공하지 못하는 인생과 관련 있어요. -89쪽


카버는 누가 봐도 훌륭하기 짝이 없는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글로 써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여기에 실린 인터뷰들은 하나같이 훌륭하지만, 그중에서도 이거야말로 레이먼드 카버를 묘사한 글들 중에서도 백미라고 느낀 글이 있다.


커튼이 제대로 쳐 있지 않은 밝은 부엌 한 곳에서, 누군가가 맥주를 꺼내고 있다. 저 아래 길거리에서는 제재소 일꾼 하나가 여자친구를 저녁 식사에 데리고 가려 하고 있다. 길 건너에서는 누군가가 친구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저 바깥 어디에선가, 카버의 소설이 발생하고 있다. -338쪽


(저 문장을 읽었을 때 과장이 아니고 진짜 돌고래 비명을 질렀...)


그는 단편소설은 같은 소설의 지붕 아래에 있으나 시에 훨씬 가깝다고 말하곤 했다. 카버는 자신을 이야기꾼보다는 시인이라 여겼다. 언어를 최대한 경제적으로 사용하고, 문장을 쓸데없이 축축하게 적시는 걸 극도로 경계했으며 삶의 어떤 강렬한 순간을 포착하곤 했다. 그런 까닭에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으나 카버를 좋아하기 시작하면 그의 글뿐만 아니라 레이먼드 카버라는 인물 자체를 좋아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겸손하고 친절한 사람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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