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르카디아를 발견한다면

김초엽, 므레모사

by 담화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이 제목을 봤을 때 나는 절로 므와레 moire현상을 떠올렸다. 만약 정말로 므레모사의 앞 두 음절이 그 므와레에서 따온 거라면 모사도 어딘가에서 따왔을지도 몰라. 그리고 나는 제일 그럴싸한 가설을 만들었다. 모사 mossa는 움직임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탈리아어로. 물결처럼 퍼지는 어떤 움직임, 소리, 파동... 소설을 다 읽고 난 뒤에 꽤 말이 되는 추측이 아닐까 생각했다.


므레모사는 어떤 지역의 이름이다. 커다란 화재가 발생한 이후 오래도록 폐쇄적이었던 그곳은 처음으로 방문객을 받아들인다. 저마다의 방문 목적을 가지고 그곳을 찾은 총 여섯 명의 투어리스트들이 있다. 다크 투어리스트, 대학원생, 기자, 유튜브 크리에이터, 그리고 목적을 알 수 없는 남자와 주인공인 유안이 그들이다. 유안은 사고로 다리를 잃은 무용수다. 의족을 차고 있지만, 환지통과는 다른 종류의 증상을 겪고 있다.


하지만 새벽이 되면 나는 알 수 있었다. 고요와 적막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깊은 밤이 되면, 바로 이곳이야말로 내가 궁극적으로 머물러야 할 자리라는 걸. 흔들림도 뒤척임도 없는 부동의 장소. 움직임이 없는 몸. 모든 것이 멈춰 선 몸. 그 몸 안에서 나는 고통도 괴로움도 없이 자유로웠다.

한나는 도약하는 나를 사랑했고 나는 도약을 멈추고 싶었으므로 우리의 끝은 정해져 있었다. 이제 더는 도저히 춤출 수 없다고, 더는 움직임을 원하지 않는다고, 모든 움직임이 매 순간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고 (중략) -172쪽


사랑했던 연인이 원하는 자신의 자리와 스스로가 머무르고파 했던 자리의 단차는 끊임없이 유안을 괴롭혔다. 그녀가 가졌다가 잃은 것이 너무도 컸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속닥거린다. 아마도 이래서일 거야, 저래서겠지.


사람들에게 므레모사는 그저 삭막한 비극의 장소였고, 혹은 비극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의 장소였으므로, 대체 그곳에서 보려는 것이 무엇이냐고 사람들은 내게 재차 물었다. 나는 단지 짧게 답했다.

"그냥 뭔가를 보고 오려는 거야. 내가 원하는 무언가가, 거기에 있을 것 같아서."

어떤 이들은 나의 실패를, 좌절을, 끝난 사랑을, 평생을 다 걸었던 이를 갑작스레 내려놓기로 한 선언을 그것과 관련지어 추측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보고 오려는 것이 정말로 무엇인지 나는 끝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173쪽


내가 바라는 건 죽음이 아니었다. 나는 삶을 원했다. 누구보다도 삶을 갈망했다. 단지 다른 방식의 삶을 원할 뿐이었다. -175쪽


사람들에게 지친 유안은 그곳에서 자신의 남은 삶을 이어가기를 원한다. 이미 존재하는 삶의 양태들은 너무나 이분법적이어서 유안은 지쳤을 것이다. 원치 않는 사람에게까지 분류 안으로 들어오기를 강요하는 목소리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을 테고. 유안의 시점에서 보면 그녀의 선택은 합리적이고 옳다.

결정적인 파국을 맞기 직전까지 뜻을 같이했던 누군가의 선택 역시 그의 관점에서는 옳다. 다만 어떤 극적인 순간에 상대의 옳음과 나의 당위가 맞부딪히는 순간 어느 한쪽은 반드시 깨어져나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철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공존과 사회학적 가치관에서 바라본 공존은 같은 이 소설에서만큼은 같은 개념이 아닌 것만 같다. 나는... 글쎄... 한두 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지만, 같은 가치를 공유하자는 은근한 권유조차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만 재확인한 기분이다.


유안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주연이 상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실은 알 것 같아요. 언니는 므레모사의 귀환자들을 만나러 온 거죠? 죽음의 땅에서도 다시 꿋꿋이 살아가는, 희망을 가지고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 정말로 좀비처럼 변했어도 뭐 어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게 중요한 거잖아요. 분명 우리가 귀환자들에게 배울 게 있을 거예요. 반대로 언니가 그 사람들에게 영감이 될지도 모르고요. 아, 언니랑 그런 인터뷰할 생각 하니까 벌써 너무 두근거리는 거 있죠?” -70쪽


그러니까 이런 거 말이다. 때로는 순진한 동경이 폭력이 된다는 사실이 소름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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