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살구 외,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 단편 수상작품집 2021
기술적으로 단어들이 모인 집합이라 봤을 때, 소설은 뭔가를 담기 위해 만든 단단한 그릇이다. 신묘하게도 심상이나 감정처럼 실체가 없는 것을 포착해서 담을 수 있는 그릇.
(...)
전체적으로 보자면 내 기억력은 형편없는 편이다. 그러나 몇몇 순간만은 지금도 선명하고 생생하게 떠오른다. 어떤 것들은 벌써 40년도 더 지난 일인데도 말이다.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내 무의식은 그 순간들을 여전히 충격과 자극으로 느끼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내가 소설에 담아내고 싶어 하는 본질들은 바로 그런 순간들에 담겨 있는 것 같다. -단편소설 쓰기의 모든 것, 42쪽
단편소설을 쓰는 데 정해진 규칙은 없겠지만(없... 겠지?) 모두가 암묵적으로 따르는 가이드라인은 있을 것 같다. 장편소설에서는 다소의 둘러감도, 필요 없는 지방이나 다름없는 과도한 수식도, 독자로서는 환영하기 어려운 지나치게 디테일한 서사도 (사실 없어야 좋지만) 용서하지 못할 정도의 중범죄는 아니다. 하지만 단편소설에서라면, 그건 문제다.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래서 단편소설 공모전 요강을 볼 때마다 가끔 고개를 갸웃한다. 신인 기성 불문하고 응모 가능하다고 써 놨지만, 신인이... 잘 쓰기 어렵잖아요, 단편은...(물론 괴물 같은 신인, 혜성신인이란 말이 있으니 분명 있긴 있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글밥 좀 먹어본 사람이 덤벼볼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며 입술을 부루퉁히 내밀고 못 본 척한다. 여우와 신포도가 따로 없다.
교보문고에서 매해 단편공모전을 열고 있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 공모전 수상작은 장편 공모전이 아니고서는 잘 안 읽었다. 그러다 우연히 모 공모전의 수상작품집을 읽게 됐는데, 이게 생각보다 너무 괜찮았다.
수상작가가 사실은 슬쩍 필명을 새로 판 기성작가 아니냐고 미심쩍게 생각할 정도로. 그런데 이게 순전히 나의 오해겠구나 싶었던 것이, 그 이후로 호기심이 생겨 쭉쭉 보게 됐던 공모전 수상작들이 전반적으로 정말 신인? 인가 여러 번 생각하게 할 정도로 다들 잘 쓰시는 게 아닌가... 그 후로 출판계 쪽 분에게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는데, 글마저도 양극화 현상이 대단히 심해지고 있다는 거였다. 그렇단 말이지...
11월에 서울을 한참 떠돌 때, 온갖 대학가에 있는 A서점 중고매장을 갈 수 있는 데는 최대한 가본 것 같은데 하나같이 지하 1층에 있었다. 내가 제일 자주 가는 단골매장은 3층에 있어서 처음엔 좀 어색하게 느꼈는데, 알고 보니 지상에 있는 매장이 그리 많지 않은 듯했다.
시간관계상 장편소설을 구경하긴 적당치 않고, 기분상 논픽션이나 에세이를 읽고 싶진 않았으니 선택권이 없었다. 매장 안을 돌아다니며 단편집을 구경하다 이 책을 찾았고, 개중 가장 빨리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분량의 단편을 찾아 펼쳤다. 인간인 할아버지와 결혼해 육지로 올라온 할머니, 생의 끝에 이른 인어 할머니를 둘러싼 그 이야기를 금세 다 읽었음에도 책이 쉬이 덮이지 않아 나는 한참 가만히 서 있었다.
화자의 할머니는 인어다. 육지로 올라와 인간이 되어 인간을 닮아간다. 죽을 때가 되어가는 할머니를 찾아와 바다로 돌아가기를 종용하는 인어 일가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하는 할머니를, 화자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서 묻는다. 바다로 돌아가는 게 할머니한테는 더 좋은 게 아니냐고. 할머니는 화자를 타이르며 인어의 언어에는 이별이나 헤어짐이 없어서 그들은 상실의 감각을 모르기 때문에, 눈물을 흘릴 줄도 몰라서 눈물샘이 퇴화해 버렸다는 이야기를 해 준다. 바다로 돌아가면 육지로 올라와 살았던 세월은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고. 할머니는 함께 한 시간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인어였던 할머니에게는 부자연스러운 형식이지언정 인간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는 거라고. 하지만 인어 일가는 끈질기게 할머니를 바다로 데려오려고 설득을 포기하지 않고, 결국 할머니는 돌아가신다. 할머니를 보내는 길, 화자가 겪었던 일을 묘사하는 건조한 한 문장은 바다로 들어가기 직전, 바닷물과 닿아 있는 모래사장의 끝 같았다.
"이거 봐라. 할머니 손 봐. 할머니는 이런 굴곡들이 참 좋더라. 없애고 싶지 않거든. 계속 가지고 가고 싶어. 사실 처음부터 알고도 남기로 한 거야.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서도 내가... 그렇지만 내 인생이잖니. 내 선택이고. 후회하지 않아. 내가 나를 여기까지 오게 했어. 그러니까 내 죽음을 슬퍼해주렴, 얘야."
말씀하시는 게 다정하기도 했다. 나는 더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면서 울었다. -87쪽
기어코 이 책을 사들고 돌아오게 한 건 이 이야기였지만, 실려 있는 나머지 이야기도 수상작품집이라는 타이틀에 모자라지 않았다. 한바탕 웃음이 터지지만 어쩐지 씁쓸해지는 이야기 한 편, 오싹 소름이 돋는 이야기 한 편. 블랙유머 같은 이야기가 또 한 편, 그리고 허공에 공감의 주먹질을 하게 하는 이야기도 하나. 이렇게 다섯 편의 짧은 이야기로 꽉 찬 선물상자 같은 단편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