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김정선, 세계 문학 전집을 읽고 있습니다 1

by 담화

전경과 배경 figure and ground. 우리는 한 번에 하나의 일밖에 처리할 수 없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집중력은 하루종일 초점을 맞추었다 풀었다 하기 바쁘다. 수많은 일들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밀려나기를 반복한다. 그러한 일상에 붙잡혀 있다가, 대부분의 일들을 내려놓고 독서- 그것도 세계문학전집을 읽는 일에 온전히 시간을 쏟게 되면 하루의 마디를 자연스레 인지하던 시간 감각은 어떻게 될까.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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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선 선생님은(이분의 이력을 알게 되면 자동으로 선생님 소리가 나온다...) 교정교열 전문가로 이름 높으신 분인데, 건강 문제로 피치 못하게 쭉 해오셨던 일을 그만두시고 '연고도 없고 지인도 없는' 대전으로 내려와 지내면서 그간 로망처럼 품고 살았던 일에 착수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 일이란 바로 느긋하게 세계문학전집을 읽는 것. 집 주변을 산책하는 일, 고전을 읽는 것. 이 두 가지가 꼭 빼놓지 않았던 매일의 루틴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바로 유유자적을 떠올렸다면 너무 뭘 모르는 소리일까. 하지만 인간은 제가 갖지 못한 것이 제일 먼저 보이는 법이고 매일같이 일상의 시시하고 소소한 일들로 스트레스를 만땅 받으며 사는 1인에게는 그런 것이 제일 먼저 보이는 까닭에... 실례를 범했다... 어쨌든,


맙소사, 나는 이 책을 읽다가 책보다 동네 얘기에 눈이 반짝 뜨이고 말았는데 내겐 너무 익숙한 지명과 골목과... 그런 것들이 등장하는 게 아닌가... 예 그렇습니다 여기는 아침에 산책을 나갔다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오상욱 선수를 스쳐 지나가는 그 동네인 것... (물론 나는 못 알아봤고 옆에 있던 친구가 호들갑을 떨면서 지금 누가 지나갔는지 알아? 하고 난리를 쳐서 알았다는 말을 잊으면 안 될 것 같고)


책을 읽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활동이 그렇듯 만사에는 맥락이란 게 존재한다. 그러니까 '책을 읽었다'는 서술 뒤에는 해야 할 설거지를 미루어두고 어제 읽다만 책을 손에 들었다든가(얼마나 뒷이야기가 궁금했으면 혹은 설거지를 미룰 핑계가 필요했으면), 갑자기 생각난 옛 친구가 좋아했던 책이 떠올라 허둥지둥 찾아간 서점에서 이미 절판되어 버렸다는 걸 알고 도서관에서 간신히 찾아낸 책을 빌려와 펼쳐 들었다는 숨은 사연이 있는 읽기라는 사실을 넌지시 알리기 위해서라든가 하는 목적으로 이런저런 뒷이야기가 덧붙는 경우가 왕왕 있다. 안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누군가의 독서담에는 책에 대한 정보 외에도 그런 개인적인 이야기가 사족처럼 잔뜩 붙어있는 것을 훨씬 선호하기에 (다시 말하지만 책 정보가 필요하면 온라인 서점에서 목차와 MD소개글만 봐도 충분하다) 이 책을 읽는 것이 즐거웠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인 듯하여 이런 이야기를 읽어도 괜찮을까 싶어지는 순간 느닷없이 툭 던져지는 책 제목이, 이거 함 읽어보든가. 하며 건네오는 한 권의 책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내가 열어볼 겨를도 없이 펼쳐진 책을 무심하게 요약하는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어느새 다시 건네줬던 책을 회수해 간 목소리가 읽어보니까 나는 그렇더라고, 하고 가볍게 덧붙이는 것 같은 말 두어 마디로 그 책에 대한 이야기를 매듭짓는 듯한 그런 느낌. 원래가 독서는 개인적이고 내밀한 일이지만 이 책은 그런 경향성이 더 크게 두드러지는 글들로 묶여 있다. 늘 읽은 글에 대해 두루뭉술한 인상밖에 전할 줄 모르는 나로서는 이렇게 명쾌한 독서일기는 볼 때마다 감탄만 나올 따름이다.


내가 생각하는 문학은 개별적 인간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맺는 유무형의 관계에 대한 비논리적 성찰의 기록이다. -321쪽


'형식'을 강조하고 싶다. 영상이든 글이든 불멸의 형식을 취할 수는 있어도 내용을 갖출 수는 없을 테니까. 불멸에는 내용이 없지 않은가. 다만 존재의 시간을 영속시키는 형식만 있을 뿐. 생각해 본다.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까지 갖춘 불멸이 가능할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누구에게나 한 번뿐인 삶 말고는 없지 싶다. 삶은 나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닌, 영원히 이어지는 '형식'인 데다 나만의 삶에는 누구도 모방할 수 없고 두 번 다시 반복될 수 없는 내용까지 담겨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누구나 기적 같은 삶을 사는 셈이다. -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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