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 니콜레티, 문학을 홀린 음식들
한 편의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제가끔의 방식으로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책을 읽은 것으로 만족하고 그 세계를 떠나는 사람이 대다수겠지마는, 어떤 이들은 자기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기억하려고 한다. 그런 독서가를 한 사람 소개하려고 한다.
https://yummybooks.wordpress.com/
그리고 이 책의 저자이기도 하다.
부제 그대로 이 책은 한 사람의 열혈 독자가 그녀의 삶에 관여해 온 책들을 읽어나가며, 책 속 인물들의 삶에 스며 있는 음식들을 요리하며 쓴 독서일기이자 음식 예찬론이다. 저자의 이력이 특이하다. 가업으로 푸줏간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이야기를 좋아하는 소녀로 자랐으며, 문학을 전공했다.
이다음이 주목할 부분인데, 저자는 '푸주한'으로 일한다. 요즘은 잘 안 쓰는 말이지만 책날개에 그리 소개되어 있으니 이 낱말을 그대로 가져와서 작은 놀라움을 계속 가져가볼까 싶다. 푸주한, 쉽게 말해서 정육점에서 일하는 바로 그 사람이다. 거침없이 거대한 돼지나 소를 해체하고 고기를 죽죽 발라내는 현란한 칼놀림을 선보이는 그분들 말이다.
편견을 조장하는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문학을 전공하고 틈만 나면 책을 읽고 요리를 하는 푸주한이 쓴 요리 레시피를 곁들인 글이라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인생의 전반기에 나는 요리와 독서 둘 다를, 내면으로 숨어들어감으로써 종종 불가항력으로 느껴지는 세상에서 탈출하는 방편으로 사용했다. 나는 책의 등장인물들에 깊이 공감했다. 그들이 먹는 음식들을 요리하는 것은, 그들과 더 가까워지는 자연스러운 방법이자 그들을 내가 느끼는 만큼 현실로 만드는 방법이었다. -10쪽
뿐만 아니라 한 끼의 식사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는지, 음식에 대한 관점이 어떠한지를 보면 독자는 구구절절하게 이어지는 대화에서보다도 그 인물에 대해 직관적으로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소설 초반에서 톨스토이는 두 명의 주요 등장인물인 콘스탄틴 레빈과 스테판 오블론스키가 식당에서 무엇을 어떻게 먹는지 보여줌으로써 독자가 그들의 품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오블론스키가 주문을 도맡는 것은 그가 대식가라는 사실뿐 아니라 고급 식당에서 식사하는데 익숙하다는 사실도 명쾌하게 보여준다. -241쪽
이런 방식으로 인물과 이야기에 이입하는 방식도 있을 수 있다는 걸 왜 몰랐을까. 알았더라도 나도 실천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지만, 소설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이야기에 등장했던 음식을 요리한다는 발상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천편일률적으로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하고 자신이 어떤 대목에 특히 공감했는지를 이야기하는 방식의 리뷰도 나쁠 것은 없지만, 본인만의 전문분야나 관심사에 흠뻑 적셔낸 리뷰가 많아진다면 정말 재미있겠다 싶기도 했다. 어느 소설에 어떤 음악이 등장했는지, 그 음악이 이야기의 분위기나 진행에 어떤 공헌을 했는지. 혹은 주인공들이 사는 생활공간에 주목해서. 또는 인물들의 사소하고 특별한 습관에 대해서. 내가 할 자신은 없고, 누가 쓰신다면 물개박수를 치면서 달려가 읽을 자신은 있는데.
자신의 감정과 경험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건 독서의 위대한 힘 중 하나이며, 특히 어릴 때는 더욱 그렇다. 눈앞에 펼쳐진 페이지에 내가 꼬집어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던 감정이 있었다. 나는 경이로운 동시에 위로를 받았다. -75쪽
그리고 한편으로는 지독한 연민과 공감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이 책에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작은 아씨들」에서 학교에 라임피클(이었는지 라임이었는지는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을 들고 갔다는 이유로 선생님에게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혼이 났던 에이미를 생각하면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다. 동시에, 지금처럼 외국 식자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그때 도대체 라임이란 무엇이기에 여자애들에게 그토록 인기였는지 궁금하고 애가 닳았던 기억도 떠오른다.
그때 이렇게, 책 속에 등장하는 침 넘어가는 음식들을 어떻게 만들면 되는지를 알려주며 그것이 그들에게 보이는 것 이상의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지를 조곤조곤 이야기해 주는 이런 책이 있었으면 어땠을까를 공연히 상상해 보기도 한다. 정말로 어땠을까. 라임은 어디 가서 살 수 있냐고 엄마를 성가시게 굴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