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욱x유지원, 뉴턴의 아틀리에
김상욱 박사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 건 아마도 알쓸신잡 시즌 2(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팩트체크해보지 않았으니 틀렸더라도 이해해 주시기를)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만 해도 김상욱 박사는 방송 매체의 형식이나 화법에 익숙지 않은 모습을 간혹 보여 기억에 남았는데, 놀랍게도(다른 뜻은 없습니다) 이후로 활동영역을 크게 넓히셔서 그의 모습을 보는 게 그리 힘들지 않은 일이 되었다. 그분을 보고 있으면, 96년도에 잠깐 알고 지냈던 물리학도 친구가 절로 떠오른다.
물리학에 대한 자부심이 실로 대단해서 어디에서든 자기소개를 할 일이 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학문인 물리를 전공하고 있는 ***입니다"라고 씩씩하게 외치는 이였다. 그 친구가 물리학의 위대함을 모르는 우리를 가엾게 여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사랑해마지 않는 걸 사랑한다고 떳떳하게 말하는 기상만큼은 실로 대단했다. 그와 같은 물리학도(라기보다는 물리학자)를 살아생전 또 볼 줄이야. 신기했다. 물리학엔 사람으로 치면 홀랑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마성의 뭔가라도 있단 말인가...
아무튼. 김상욱 박사의 화법에 익숙해지고 나니 그가 하는 이야기들이 흥미로워서 모처럼 알고리즘의 추천을 따라 관련 방송을 줄줄이 보고 나서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이분, 1920년대를 심각하게 좋아하시는구나. 이 시대 역시 사람들을 홀리는 뭔가가 있다는 건, 1920년대 홀리커를 제법 봤기 때문에 알고는 있었지만 물리학자의 관점으로 볼 때도 이 시대가 의미가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그러니까,
유럽에서 초현실주의의 비현실적 꿈이 그려지던 시기, 물리에서는 양자역학이 탄생했다. 양자역학은 원자의 세계가 상식과 직관을 넘어 비현실적인 꿈 같다고 말해 준다. 양자역학과 초현실주의가 1920년대 중반에 유럽이라는 동일한 시공간에서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5쪽
정말로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흥미진진했다. 김상욱 박사가 예술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이러하다면 공저자인 유지원 디자이너가 과학의 영역에 곁을 준 까닭은 무엇일까.
디자인이란 결국 클라이언트의 의뢰를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일에 가깝기에 언어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것이 비록 강렬하지만 부드럽게 다가가는 느낌으로요, 단순하지만 임팩트 있게요, 럭셔리하면서 친근해 보이게 해 주세요 같은 말의 변주에 다름 아니더라도. 언어에 예민한 사람은 타인의 언어에도 예민해진다. 그의 말마따나
물리학자로서 물리와 일상 언어를 어떻게든 화해시키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10쪽
예술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물리학자와 공통의 키워드를 놓고 글을 쓰는 것은 일이었어도 퍽 즐거웠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두 분은 작센에서 공부했다는 특이한 공통점이 있다. 언어는 인간의 사고 체계를 지배한다(언젠가 이 토픽에 대해 또 다른 잡문을 쓸 기회가 있기를). 모어가 있어도 제2의 언어로 학문적 세계를 일궈나가다 보면 뭐랄까, 일상적이지 않은 이슈를 톺아봐야 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그 언어가 가진 특성이 가동된다. 사고방식 자체가 어떤 경향성 같은 것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당위에 저항하고, 편견에 질문하고, 다양성을 각별하게 존중한다.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열어둔다. 이런 공통된 학문적 태도를 형성하는 기류가 작센의 공기 속에 떠다니는 것 같았다. -11쪽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자 특징이라면 역시 두 저자의 예술적 경험이 녹아든 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소위 말하는 미적 경험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인 데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자신의 감상 경험을 말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풍조가 있기에 미술 전시회나 특정한 작품에 대한 개인의 느낌을 솔직하게 말하는 글을 찾아보기가 대단히 어렵다. 물론 두 저자를 평범한 예술 감상자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각자의 전문 분야를 접목해 작품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경험하는 것은 꼭 해볼 만한, 아니 해봐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 내게 가장 울림이 컸던 글을 잠깐 소개하고자 한다. 김상욱 박사가 쓰신 글이고, 장 프랑수아 밀레와 요하네스 페이메이르의 작품을 놓고 평균의 오류를 거쳐 끝내 민주주의를 언급한 글이다. 이 키워드만 보고서는 도대체 이게 어떻게 연결이 되어 한 편의 글이 될 수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을 수도 있는데, 정말이지 일독을 권한다.
뒤편에 대략 16pt 정도로 '창의력은 서로 다른 분야들 간의 소통에서 피어난다'라고 빡... 박혀 있는데 정말이지 맞말. 자기 분야만 들입다 파면 되는 세상은 사실 이미 오래전에 끝났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