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순간 수많은 가능성을 재어보는 삶을 사는 너에게

이경희, 매듭 정리

by 담화

누구보다도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 사실은 가장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를 찾아오는 감정은 어떤 것일까. 황망함일까. 배신감일까, 거대한 혼란일까.


SPOILER ALERT!

초단편 소설의 특성상 가장 중요한 스포일러를 언급하지 않고 이 글을 쓸 수 없었음을 미리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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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연이에게, 하고 누군가의 이름에 담뿍 애정을 심어 부르는 첫머리가 지나가면 우리는 금세 편지를 쓴 이가 소연이의 아빠이며 소연이는 어디엔가, 아빠의 손과 부름이 닿지 않는 곳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불안한 느낌을 갖게 된다. 아무래도 편지라는 매체의 속성상 거리감이 먼저 느껴진다. 쓰는 이와 받는 이가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겠구나 하는 선입견이 생긴다. 그게 물리적 거리감일지, 정신적 거리감일지 혹은 이제부터 생겨날 거리감일지는 모르지만.


소설의 화자는 딸이 어려서부터 얼마나 특별한 아이였는지를 애틋하게 회상하지만, 그 아이가 실제로 '특별한' 능력을 타고났기에 그에게 익숙한 시간의 삶을 살 수 없는 사람임을 알게 된 순간부터 아빠의 마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지 않았을까. 한 사람의 평범한 부모로서 화자가 딸에게 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의 세계였을 텐데, 딸은 이미 저를 둘러싸고 사방에 펼쳐진 수많은 평행우주의 삶 속에서 한 길을 선택하고 나머지를 꼼꼼하고 매듭지어 닫아가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기분이란 어떤 것일까.


시간의 망원경. 너는 너 스스로를 그렇게 표현했어.
네 행동이 산만하게 느껴졌던 것도 당연해. 네겐 일의 순서라는 게 없는 셈이니까.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눈앞에 동등하게 펼쳐져 있을 테니까.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를 헤엄치는 네게 옷을 입고 벗는 순서 따위는 너무나 사소한 문제였겠지. -29쪽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 스스로의 삶을 깔끔하게 정돈하게 되는 어느 시점에 이르기 전까지는, 쭉쭉 앞으로, 옆으로 확장해 나가는 삶을 사는 것이 당연했을 화자에게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완성되어 있고 존재하고 있는 삶의 길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며 남은 선택지를 닫아간다는 삶의 형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충격이었을까. 그것도 다름 아닌 가족이 그런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적응할 틈도 없이, 그것이 자신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상실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되는 순간 의연해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럼에도 그 삶을 받아들이기를 부탁받는 순간, 그 선택에 도덕적인 채무의 무게가 깃들어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발생할 딜레마는 또 어떤가. 60페이지 남짓한 이 짧은 소설에 그 모든 이야기가 다 들어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무거운 사랑이, 애끓는 갈등이, 그럼에도 선택하고자 하는 의연함과 단호한 결의가 다 들어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며 「네 인생의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기가 더 어렵다. 하지만 얼핏 비슷하게 읽히는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다르게 읽힌 이유는


생각해 보면 어차피 나는 너를 이길 수 없어. 내가 네게 들려주는 말들도 결국 네가 선택한 결과일 뿐이니까. 나는 너의 선택에 갇혀 있어. 네가 고정한 현실에 매여 있는 납작한 존재일 뿐이야. 너는 내가 인지할 수 있는 세계 바깥에 서 있어. -46쪽


이 소설이 부모와 자식 관계에 관한 알레고리처럼 읽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국 부모란 자식이 어떤 선택을 하건, 어떤 삶을 살건 관여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처럼. 그 선택이 때론 내 마음을 칼처럼 베어내더라도 최소한 이해하려고 노력이라도 해보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다는 사실을 새삼 가르쳐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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