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의 술, 웬수 같은 술

세상 시름을 잊다 못해 가끔 내가 누구인지도 잊는 게 문제지만

by 담화

2x 년 전 나의 모친께선 저 말씀을 입에 달고 사셨다. 어머니께서 알콜을 천하의 원수처럼 여기게 된 데에는 술자리를 마다하지 않는 호인에다 술고래인 남편에다, 그분의 피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장녀(그것이 저임미다 에헴), 술을 즐기지는 않으나 입에 댔다 하면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이튿날 다 죽어가는 꼴로 귀가하는 아들의 죄가 컸다. 내가 걱정을 끼치는 놈으로 살던 시절엔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모친의 심경을 감히 짐작하려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사회생활 하면서 술 좀 마실 수도 있지 뭘 왜 그러시나. 학생 시절엔 이웃학교 공학도이던 절친이자(같은 애니메이션 오타쿠인 관계로 돈독한 친분이 있었다) 술상무를 도맡았던 P1군, 사회인으로 진출한 이후엔 의형제 같은 의남매를 맺었던(도대체 무슨 인생을 산 건지) J1군과 펌핏업의 제왕 Y군 등등의 서포트가 아니었다면 나는 진작에 길바닥 어딘가에서 생을 다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수세월이 지났지만 제군들의 은혜는 여전히 잊지 않고 있다. 고마웠어. 아, 이게 아니고.


업보빔은 실재한다. 어흑...


위풍당당 새내기의 명찰을 단 딸이 신입생 OT를 떠나는 날 새벽에만 해도 나는 무슨 별일이 있으랴 태평했다. 자라면서 큰 걱정을 끼치지 않았던, 유별나게 키우기 수월한 아이였다. 야무진 아이여서 잘 다녀오겠거니 했다. OT 첫날밤 느지막한 시간에 엄마 좀 피곤하네, 전화통화는 못 하겠어. 이렇게 재잘거리는 카톡을 보내온 그놈이 이미 술이 개떡이 되어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이튿날 저녁,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자니 어째 등골이 스산해져서 '적당히 거절하면서 마셔'라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녀석의 반응이 어째 심상치 않았다. 그때부터 기분이 상당히 저조했는데, 그 감을 믿었어야 했는데.


다음날 오전 열시던가 열한 시던가, 정말로 다 죽어가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가장 걱정하던 사태가 발생했음을 알게 됐지만 대체 뭘 어쩐단 말인가. 고등학생도 아니고 이제 성인이 된 아이가 술병이 나서 쓰러졌다고 학교까지 찾아가서 진상을 부리면서 애를 끌고 나올 것도 아니고(물론 나는 그럴 수 있는 성격이다... 다만 아이가 자퇴를 하겠지 ㅋㅋㅋ) 말조차 못 하겠다며 전화를 끊어버리는데 그때부터 속이 바짝바짝 타는 거다. 그래도 우리 엄마는 숙취로 2박 3일 헤롱거리는 내 꼴을 보며 속이 터졌을지언정 옆에서 뭐라도 챙겨줘 가며 등짝을 후려갈길 수나 있지 않았나. 나는 지방 사는 죄로 등짝스매싱을 날리지도 못하고 뭐 하나 챙겨 먹이지도 못하는데 이거 너무 혹독한 거 아닌가. 그렇게 돌아오는 날까지 숙취로 죽어가는 애를 떠올리면서 화병이 난 나를 심적으로 수발드느라 안 그래도 바쁜 남편은 얼굴이 꺼주해지고. 이게 무슨 환장의 트리오인가. 때마침 모친께서는 **이 서울에 잘 있대냐, 고 약 올리는 의도는 전혀 아니셨겠지만 타이밍도 기막힌 전화를 걸어오시질 않나. 이차저차해서 속이 상해 죽겠다, 고 하소연을 하니 다 듣고 계시던 모친께서 침중하게 한 마디 하시었다.


-이제 그때 내 속이 좀 짐작이 가냐.


우는 소리를 돌돌 몰아 목구멍 너머로 넘기자마자 냉큼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공손하게 스마트폰을 받쳐 들고 석고대죄했다.


-잘못했습니다 어머니.


반성하는 동시에 새삼 생각한다. 함께 자리하고 있는 자에게는 그만한 도락이 따로 없는 술이란 놈은, 그 자리가 파하고 난 뒤의 뒷감당과 속끓임을 감내해야 하는 이에게는 불구대천, 철천지원수나 다름없구나.

그 옛날 함께 주거니 받거니 하던 지우들과 이럴 때 꼭 했던 말이 있다. 이런 백해무익한 인류의 적, 당장 먹어 없애버리자! 철딱서니 없는 그 선창에 와아아, 환호했던 여러분. 여러분의 소식을 수소문하여 어찌, 나 같은 업보를 감당하며 살고 있는지 문득 묻고 싶어 집니다...


술 마시는 기분만큼은 옛날 그대로 내고 싶을 때는, 이 책만 한 것이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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