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절하게 대비하기
민주가 적어 내려 간 단어 네 개를 멀뚱히 보는 학생들의 얼굴은 큰 표정 변화가 없었다. remedy, solution, antidote, lifeline. 마지막 e자를 쓰고 마침표를 커다랗게 찍은 민주가 구시렁댔다.
"얘들아, 학기 초라서 유별나게 의욕 안 생기는 건 알겠는데 나 무안하니까 형식적인 리액션이라도 좀 해줘 봐라."
"우와아아."
정말이지 의욕 안 나는 반응이라고 생각하며 민주는 교실을 쭉 둘러보았다. 그래도 스무 명 남짓한 아이들이 모두 영혼 탈주 상태인 건 아니었다. 개중 또랑하게 시선을 맞춰오는 아이들을 보면서 민주가 물었다.
"쌤이 적어놓은 게 뭔지 알겠는 사람?"
"치료제, 해결안, 해독제, 구명줄이요."
"영어쌤 어디 아프세요?"
"하나만 빼고 나머지는 다 모르는 단어요."
리액션 좀 하랬더니. 민주는 쓴웃음을 삼키며 교탁을 탁탁 두드렸다. 물론 선생이 그런다고 아이들이 순식간에 집중해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서도 어쨌든 주의를 환기할 필요는 있었으니까.
"늬들, 살기 힘들 때 있지 않아?"
"맨날 힘들어요."
"그니까요."
"태어나고 싶은 적 없었거든요."
"맞아. 낳아달란 적도 없는데 내가 너 낳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러면 뭐 어쩌란 건지 모르겠어요."
그냥 고개만 끄덕끄덕 해줘도 되는 질문이었는데. 반응이 좀 왔으면 하는 질문에는 심드렁했다가 가볍게 지나가도 좋을 질문에는 격하게 공감을 표하는 아이들을 보며 민주는 뒷목이 땅기는 것을 느꼈다. 에휴, 이거 괜히 말 꺼냈나.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절반은 엎질러진 물이었고 주워 담기엔 선생의 위신이 말이 아니었다. 에라이, 뭐가 됐든 꺼냈으니 끝까지 간다. 민주는 태연을 가장한 채 짐짓 명랑하게 나이답지 않게 권태에 찌든 얼굴들을 둘러보았다.
"진이가 말한 뜻이 맞아. 차례대로 치료제, 해결책, 해독제, 생명줄. 근데 쌤이 이거 왜 적어놨을까? 뜻 물어보려고?"
"좋-은 말씀 해주시려고요."
이름을 미처 외우지 못한, 다소 반항적인 태도를 가진 아이 하나가 이죽거렸다. 참자, 참아. 이제 열아홉인 애들한테 목에 핏대 세워서 뭐 어쩔 건데. 자기세뇌를 열심히 하며 민주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말을 이었다.
"새 학년 올라오면서 너희 다 어느 정도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을 거야. 아마 수업 들어오시는 쌤들마다 다 올해 열심히 해 보자, 늬들 한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렸다 뭐 그런 말씀 많이 하셨을 테니까 쌤은 좀 덜 교육적이지만 대신 실생활에 쓸모 있는 얘기를 해줄까 해. 일단 미안한 얘기 하나 할까. 올해 너희는 진짜로 각자도생해야 돼. 친구들을 다 경쟁자 삼아서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뜻이 아니야. 아마 늬들이 지금껏 살아온 인생 통틀어서 제일 피폐하고 강퍅한 일 년이 될 건데, 거기서 각자 어떻게든 버티고 생존할 방법을 찾아야 한단 소리야."
여전히 웬 뜬구름 잡는 소리야, 하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을 하나씩 마주하며 어쩐지 차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 사람이라도 진지하게 들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뜻밖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분위기에 민주는 등을 꼿꼿하게 폈다.
"그 시기를 먼저 지내본 선배로서 가르쳐 줄게. 첫 번째, 치료제.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힘들 때 기분을 바로바로 달랠 수 있는 자기만의 가벼운 위안거리를 만들어 두라는 거야. 참고로 쌤은 그때 우리나라에서 구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레몬맛 디저트를 전부 다 섭렵했어. 입안에 상큼한 맛이 도는 게 들어오면 기분이 되게 좋아졌거든. 쌤이 만약 재수했으면 아마 대학 안 갔어도 외국의 유명한 스낵 브랜드에서 궁극의 레몬맛 전문가로 모셔갔을걸."
어깨를 으쓱이며 떠벌리는 말에 와르르 웃음이 터졌다.
"살 안 쪘어요?"
"살찌는 게 대수니. 내 마음이 생존하는 게 먼저지."
"그럼 해결책은 뭐예요?"
"솔루션은,"
민주가 어느새 조금 제게 기울어진 고개들을 보며 기분 좋은 얼굴을 했다.
"종종 발생하는 스트레스성 상황에 대해서 적절하게 스스로 대응할 수 있는 가벼운 대응책을 만들어 놓으라는 게 치료제라면, 해결책은 그 일이 발생하면 얼른 어른들 손을 빌리란 얘기야. 혼자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문제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거기서 발생하는 온갖 돌발변수가 얼마나 많은지는 예를 다 들 수도 없어. 이런 경우엔 내가 혼자서 해결해보려고 부둥켜안고 쩔쩔매는 것보다는 빨리 전문가의 조언을 받는 게 제일 좋거든?"
"쌤도 그런 게 있었어요?"
"...쌤은 잠이 많은 편인데, 근데-"
[표제어_대처하다/모티브_로버트 M.새폴스키 「스트레스 : 당신을 병들게 하는 스트레스의 모든 것」]
BGM_Erik Satie : Vexa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