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능 다음에는 지성을 생각하자

맥스 베넷, 지능의 기원

by 담화

도대체 언제 다 읽을까, 읽을 수는 있을까... 반신반의했던 책을 드디어 끝냈다. 일단 자축. 그리고 셀프쓰담을 시전한다. 고생했다 나자신. 책의 어마어마한 두께 때문이 아니다. 최초의 무한 물음표는 거의 서문에서, '새겉질'이라는 어디서 많이 본 낯익고도 친근한 인상을 주는 하지만 역시 낯선 그놈을 맞닥뜨리고서 잠깐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낯익은 단면도에 또 다른 낯선 친구 "둘레계통"과 맞닥뜨리고 "......" 한 감정은 아주 명확한 짜증이 되어버렸다.


신피질이나 변연계가 뭐 하는 친구인지는 몰라도 이름은 많이 들어본 사람은 분명 적지 않을 텐데, 글쎄. 새겉질까지는 그렇다 쳐도 둘레계통... 이 단어가 변연계를 대체한 지 오래된 걸까. 정말 모르겠다. 이때부터 피어오른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어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를 지독하게 괴롭혔다. 이어 등장한 바닥핵은 양반이었다. 가쪽겉질, 이마엽앞겉질, 안뜰감각이 등장하면서 나는 소위 말하는 게슈탈트붕괴 증상을 심각하게 겪었다. 내가 아는 것 같긴 한데 이게 그게 아닌 것 같고 그러면서도 맞는 것 같고.


신경외과 갈 일이 또 생기면 진지하게 물어볼까 생각도 했다. 요즘 정말 이렇게 반토막짜리 우리말 섞은 용어로 대체되고 있는 건가요? 이게 ㄹㅇ 현실입니까? 아니 새로 배우는 사람은 그렇다 치고 이미 기존 용어에 익숙한 분들은 이 괴리감을 어떻게 버티시는 거죠. 진짜 궁금하네... 전공자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나는 미치고 환장하고 팔짝 뛸 것 같은데.

그리고 우리말로 다 바꾸고 싶으면 다 바꾸든가, 이마葉앞겉質은 뭔가... 전전두피질 잘 쓰고 있었잖아요... 실제 학계에서 저렇게 쓴 지 오래된 것인데 내가 (무식하게도) 몰랐던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심리적 저항감이 크다... 너무 커... 이 저항감을 이기고 완독하는 게 약간 인간승리였다. 물론 번역하신 분께는 아무 유감없다.


인고의 시간이 너무 길었던지라 불평 가득한 서설이 길었다. 각설하고.


http://aladin.kr/p/RR1U6


한 줄 요약하자면, 이 책은 본격 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인간의 지능이 어디에서 발원했으며 어떤 발전 과정을 겪어 현재에 이르렀으며, 인간의 지능에 최대한 가까운 인공지능을 구현하기 위해 전문가들이 어떤 방식의 연구와 실험을 이어왔는지를 간략(일까)하게 정리하고 있다(한 줄은 아니고 한 문장에 간신히 쑤셔넣었...)


흥분성 신경세포와 억제성 신경세포가 존재함으로써 반사작용이 일어나는 데 필요한 논리를 구현하는 최초의 신경회로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 신경세포들을 통해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마'라는 규칙을 강제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신경세포 회로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지능의 한 단면일 수도 있다. -70쪽
현대의 AI 모델은 좁은 AI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특별히 훈련을 받은 한정된 상황에서만 작동할 수 있다는 의미다. 사람의 뇌는 범용으로 보인다. 다양한 상황에서 작동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연구의 초점은 인공일반지능을 만드는 데 있었다. 하지만 거꾸로 연구해 온 것인지도 모른다. 새겉질이 자신의 일을 그렇게 잘할 수 있는 이유는 어떤 면에서는 현재의 인공신경망보다 훨씬 범용성이 낮기 때문일 수 있다. -254쪽


전술한 거대한 진입장벽을 무사히 극복할 수만 있다면 내용면으로는 강력하게 추천한다. 일단 재미있다. 정말이다. 저자는 고대의 포유류 조상으로부터 현재의 인류에 이르기까지 뇌가 거쳐온 거대한 변화 속에서 결정적 순간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만한 분기점을 다섯 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1 조종, #2 강화, #3 시뮬레이션, #4 정신화, #5 언어의 단계로 분화할 수 있는데 각각의 과정을 거치며 '좋고 나쁨'만 분간하여 명령을 내릴 수 있었던 뇌가 나를 제외한 바깥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을 가동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해 왔다는 사실과 증거들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이 새로운 분화의 시기임을 이야기하는 저자의 말에 절로 귀를 기울이게 된다.


항목명만 보면 저기에 뭐가 있을까 싶은데 그야말로 생존본능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생물들 가운데서, 오로지 '좌우대칭'의 뇌를 가진 동물들만이 최초의 혁신을 통해 살아남는다. 거기에서부터 모든 변화와 혁신이 시작되었다는 정언이 몹시 놀랍고 충격적이다.


최초의 뇌가 어떤 것이 생존에 도움이 되는 좋은 것이고, 어떤 것은 해로운지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뇌는 복잡성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AI에게도 익숙한 강화학습, 그 개념이 개입하면서 뇌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뇌는 지극히 단순한 좋고 나쁨의 신호를 바탕으로 자가학습과 발전을 거듭한다. 그리하여 완전히 새로운 스테이지로 진입한 뇌는 드디어 시뮬레이션을 배운다. 논리적인 결론, 그러니까 그것이 그저 생존에 관계된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해도 그러한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은 엄밀히 말해 추론이며, 그것은 보다 성숙한 뇌가 하는 일이다. 시뮬레이션은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가능성의 영역을 가상으로 실험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시뮬레이션이 익숙해진 뇌는 이후 내적 모델을 만드는 과정으로 들어선다. 인류는 초기 영장류로 진화한 상태이다. 자신의 마음에 대해 추론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고, 이를 통해 뇌는 한층 정교한 영역으로 세분화된다. 그리하여 드디어 언어가 등장한다. 언어는 각자의 내적 시뮬레이션을 어떠한 의도를 품은 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집단이 확장되고 사회가 만들어지는 토대가 되며 드디어 인간은 지식을 축적하여 지능의 어떤 한계를 향해 도약할 순간을 맞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가 지능이 가게 될 방향에 대해 어떤 결론을 냈는가 하면...


그것은 책을 통해 확인하시길 바라고 :)


물론 그의 결론에 동의하는지 동의하지 않는지는 독자 개인의 몫이지만(참고로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ㅎㅎ) 그의 추론 과정은 본격적으로 도래한 AI시대에 어떻게 대처할지 각자의 입장을 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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