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존 스칼지, 스타터 빌런

by 담화

표지가 독자를 낚을 수 있는가.

정답, 있다. 완전완전 가능하다.

고양이를 기르지 않지만, 고양이를 좋아한다. 친구들 중에 두 마리 이상의 고양이를 기르는 냥집사들이 있다. 아무 개연성도 없이 고양이를 때려 박은(?) 표지라면 이거 뭐냥, 하고 무시하겠지만 내용과 관련이 진지하게 많은 영희 씨가 표지에 등장하는 책이라면 아묻따 일단 결제하고 봐. (는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케이스는 아니고)


http://aladin.kr/p/zRJrY


스타터 빌런이 뭔데, 대체. 제목과 내용에 대한 감을 상당히 잘 잡는 편인데 이 책만큼은 감이 안 왔다. 2/3도 아니고 3/4를 읽어갈 때에야 비로소 아하를 외쳤지만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주인공은 돈에 찌들리는 임시교사다. 어느 정도로 찌들리냐면 공과금도 제때 못 내고 재산세도 밀렸으며(반대였나? 아무튼), 은행에 대출 신청을 하러 가면 대차게 까인다. 한마디로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대책이 없다. 한때 경제지 기자였기도 한 경력을 생각하면 독자가 다 암담할 정도다.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고 있는데 고양이 사료(야옹 믹스였던가) 값은 어떻게 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말해줬겠지만 기억 못 한다). 그러던 그가 신데렐라가 된다(는 아닌가). 억만장자였던 삼촌이 돌아가시면서 그에게 사업체와 더불어 어마어마한 유산을 상속한 것이다! 짜잔, 인생역전이다.

... 겠냐고.

이런 군침 넘어가는 이야기를 들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그의 집은 반파된다. 길바닥에 나앉은 그에게 도움의 손길이 뻗어진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이 얼마나 수상쩍은 일인가! 갑자기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음모, 협잡, 그리고 황당하지만 믿지 않을 수 없는 세계의 일탈 속에서 우리의 가련한 주인공 찰리는 잘도 정신을 붙잡고 버틴다. 대단하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그렇잖아요,

자본주의 계급사회의 최상단을 차지하고 있는 악당들의 모임의 일원으로 초대받은 것도 눈앞이 어질어질할 일인데, 간신히 그쪽 스케줄을 소화하고 나면


(스포일러 같지만 책 뒤표지에 나와있는 소개글에도 있으니 그냥 씁니다)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돌고래들과 노동쟁의가 기다리고 있는데, 이 돌고래들이 보통내기가 아니란 말이다.


"만나서 반가워." 내가 말했다. "일종의 노동쟁의를 하는 것 같은데." '쥐뿔도 신경 안 써'가 코웃음 쳤다. "아는 척하긴."
"나도 노조원이었거든." 내가 말했다. "<시카고 트리뷴> 노조."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니잖아? 지금은 경영진이라고! 이 썩어빠진 내장 같은 부르주아 압제자!"
"썩어빠진 부르주아! 썩어빠진 부르주아!" 나머지 돌고래들이 일제히 외쳤다. -109쪽
"아, 불쌍하고 하찮은 인간아." 73이 말했다.
"이 문제에 관해 내 온정에 호소할 생각은 하지 말았어야지. 첫째, 좆까. 둘째, 우린 돌고래야. 우리 종은 완전 개자식들이지. 디스커버리 채널 본 적 없어? 우리는 고양이만큼이나 성질이 더러워." -280쪽


앤디 위어의 양뺨을 연타로 후려치고 갈 정도로 인상적인 대사였다... 특히 이 대사의 독창성은 말하는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온순하고 사랑스러운 안면부를 가진 극히 무해해 보이는 돌고래가 발화자라는 데에서 비롯한다.

여기서 나는 기존의 선입견이 부서지는 충격과 더불어 약간의 세계관 해체와 재건설 과정을 동시에 겪었는데... 왜냐하면 적어도 내가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 '캐릭터 롤 role'에서는 저런 대사를 칠 수 있는 건 돌고래가 아니라 범고래 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친 입담을 구사하는 돌고래라니 멋있지 않나. 상식파괴의 신선함이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책을 다 읽었는데도, 이건 순전히 나의 덜떨어진 이해력 탓이겠지만 찰리의 돌아가신 삼촌의 사업의 정체를 여전히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겠다.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 하나는 이 소설이 엄청나게 웃기고, 풍자적이라는 것.


내 편인줄 알았던 사람이 알고 보니 저쪽 편이고 저쪽 편인 줄 알았던 사람은 우군이었고... 아무튼 이 소설은 내내 독자를 정신없게 만든다. 정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믿을 만한 존재는 그저 고양이뿐이었다는 걸로. 표지의 고양이가 아마도 헤라인 것 같은데, 이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캐붕 없는 유일한 등장인물이자 수퍼히어로(처럼 보였다)나 다름없는 수퍼스마트인텔리전트 고양이 헤라를 소개한 걸로도 이 소설은 제 몫을 다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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